[경남에 있다. 전국에 잇다]형평운동의 발상지, 진주

임명진 2025. 4. 21.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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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차별 없는 사회, 평등한 세상을 꿈꾼 고장
진주에서 시작된 ‘형평운동’ 전국으로 번져나가
차별 철폐·혐오 극복은 현 시대에도 절대적 과제
‘법의 날’과 닮은꼴 ‘형평의 날’ 제정해 함께 기려야
4월의 진주는 낭만과 포용의 도시다. 진주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남강과 둔치엔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해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하지만 진주의 매력은 이처럼 화려한 겉모습이 아닌 그 안에 녹아든 수많은 이야기에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진주 남강 둔치에 서 있는 하나의 조형물에서 시작한다.

경남문화예술회관 앞 남강 둔치에는 한 쌍의 남녀가 손을 잡은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다.

얼핏 보면 이 조형물이 무엇을 뜻하는지 선뜻 감이 오지 않는다. 근처에 있는 안내문에는 '두 손을 꼭 잡은 남녀의 형상은 평등과 자유가 넘치는 형평의 세계로 함께 나가자는 희망찬 메시지를 담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 사실 진주 사람들도 이 조형물을 생각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이들을 위해 다시 설명하자면, 이 조형물은 진주에서 102년 전 4월에 있었던 형평운동을 기리는 '형평운동기념탑'이다.
 
진주 칠암동 남강둔치에 서 있는 형평운동기념탑.


◇저울 형(衡), 공평할 평(平),

형평은 '저울처럼 공평함'을 뜻한다. 진주에서 일어난 '형평운동'은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통틀어 최초의 인권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1923년 4월 25일 누구나 공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진주 사람들의 단체가 결성되고, 그들은 당시 가장 천대받던 백정들의 신분 차별을 없애는 일을 시작했다. 바로 '형평사'이고, 그들의 활동을 '형평운동'이라고 부른다.

당시 백정들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는지를 남아 있는 여러 기록만으로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백정들은 마치 인도 카스트 제도의 '불가촉천민'처럼 모든 것에서 차별을 받았다. 부모가 백정이면 자식도 백정이 되어야 했다. 호적에는 백정을 뜻하는 '도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백정이라는 신분을 드러내는 표식을 착용해야 했다. 일반인과 함께 진주성 안에 거주하지 못하고 따로 성 밖에 그들의 집단 거주지에서 살았다.

차별을 견디다 못한 백정들은 1900년에 이를 없애달라며 진주에 있던 관찰사를 찾아가 집단청원을 했다. 천대받는 백정들이 단체로 청원한 사건은 당시에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1909년에는 진주교회에서 일반인과 백정이 함께 예배를 본 동석 예배 사건으로 다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진주교회의 동석 예배는 훗날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에서도 언급됐다. 소설에서는 동석 예배가 실패한 것으로 나와 있지만 훗날 진주교회 관계자들이 호주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찾아 동석 예배가 성공했음을 확인했다.

몇 년 전에 인기리에 방영했던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등장한 '구동매'의 출신이 백정으로 설정돼 관심을 끌었다. 미군 장교로 나온 '유진 초이'는 노비 출신이어서 신분이 철폐된 시절이지만 여전히 양반, 상놈 출신을 따지는 그 시대의 차별적인 대우를 적나라하게 묘사해 내기도 했다.
 
형평운동기념탑 안내문.


◇수천 년 지속된 신분 차별 깨트린 진주 사람들

우리나라에서 신분제는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공식적으로 철폐된다. 하지만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신분 차별의 역사는 관습이란 이름으로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그런 백정들의 차별을 가장 먼저 없애자고 일어난 사람들이 바로 진주 사람들이었다.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백정도 아니었던 진주 사람들이 주축이 돼 장지필, 이학찬 등 백정 출신들과 함께 힘을 모아 설립한 형평사는 신분차별 철폐 운동에 앞장서며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했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사람이 본디부터 어질다는 뜻)이라'

형평사 창립 때 내세운 선언문의 첫 구절이다. 이처럼 형평사는 백정들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 시작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약자가 차별받지 않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형평사는 여성과 아동의 권익 향상을 위해 여성 대의원을 선출하고 학교를 짓는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쏟았다.
 
1928년 제6회 형평사 전국대회 포스터


형평운동기념탑은 바로 100년 전, 4월 뜨거웠던 진주의 형평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설치한 조형물인 것이다. 기념탑이 처음부터 지금의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니었다.

형평운동 70주년을 맞아 1992년 결성한 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1996년 12월에 처음으로 설치할 당시에는 진주성 앞에 있었다. 그런데 그곳이 진주대첩 광장 조성사업이 시작되면서 형평기념탑은 2017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형평운동기념탑처럼 형평운동의 정신과 가치는 아직 많은 이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비롯해 지역의 뜻있는 이들이 형평운동 알리기에 힘을 쏟고 있는 가운데, 이들에 대한 지자체와 관계기관의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한 때다.
 
형평사 본부 사람들. 뒷줄 오른쪽부터 이학찬, 강상호, 맨왼쪽 장지필



◇형평의 날 제정 필요

형평운동의 상징은 '저울'이다. 저울은 백정들이 고기의 무게를 잴 때 사용하던 상거래 도구다. 그런데 형평사가 창립한 4월 25일에는 달력에 뜻깊은 날이 새겨져 있다. 바로 '법의 날'이다. 법의 날은 모든 권력의 횡포와 폭력으로부터 인권을 보호하고, 법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날이다.
 

법과 정의의 여신 '디케'는 한 손엔 저울을, 한 손엔 칼을 들고 눈을 가린 채 서 있는 동상으로 유명하다.


1963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법의 지배를 통한 세계평화대회'에서 세계 각국에 '법의 날' 제정을 권고했다. 우리나라도 1964년 세계 여러 나라의 사례에 맞춰 5월 1일을 법의 날로 제정하고 시행해 왔지만 근로자의 날과 중복되는 것을 피하고자 2003년부터 4월 25일로 변경해 기념하고 있다.

법의 날의 상징인 법과 정의의 여신 '디케'는 한 손엔 저울을, 한 손엔 칼을 들고 눈을 가린 채 서 있는 동상으로 유명하다. 저울은 공평을, 칼은 법 집행의 강력함을, 눈을 가린 것은 편견 없이 바라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 대법원에도 저울을 들고 서 있는 디케의 동상이 있다.

마침 4월 25일은 형평사가 진주에 설립된 날이다. 법의 날과 형평운동은 유사한 점이 아주 많다. 저울은 형평사의 상징과 일치하고, 공정과 형평을 강조하는 법의 날과 형평의 가치가 너무나 닮아 있다. 이 때문에 법의 날과 함께 형평의 날을 국가에서 관리하는 법정기념일로 제정해 함께 기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역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진주 형평사 창립 축하식이 열린 곳을 알리는 기념비


기념일 지정은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날 또는 민족정기를 널리 알리거나 호국정신의 뜻을 기리는 날 △과학기술·경제발전·국민복지 등 국가 주요 시책에 대한 기틀을 확립하는 데 의의가 큰 날 △문화예술의 창달과 전통적 윤리 가치의 계승·확립을 위해 국민적 인식을 같이하는 날 △국제적으로 인식을 같이해 기념하고 있는 날 △ 그밖에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기념일로서 지정할 가치가 있는 날 등에 해당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행안부의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현재 4·3 희생자 추념일, 부부의 날(5월 21일), 의병의 날(6월 1일) 등이 지정돼 있다. 올해는 5월 15일 세종대왕 나신 날, 5월 27일 우주항공의 날 제1회 기념식이 열린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최초의 인권운동으로 평가받는 형평운동, 그 발상지인 진주시가 인권 관련 정책이나 교육 등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형평의 날을 국가 법정기념일로 추진하는 범시민 운동이 필요하다.

학벌, 빈부, 종교, 성별, 인종, 국적 등에서 사회적 혐오와 차별이 남아 있는 오늘날 누구나 사람으로서 차별받지 아니하고, 평등하게 대우 받는 새로운 형평운동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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