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47) 화랑도 창설

화랑은 신라 삼국통일의 가장 큰 원동력 중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신라의 강력한 힘의 원천이 되었던 인재양성기관이자 청소년 군사집단으로 기능했다.
화랑은 법흥왕 시대에 왕가의 호위무사집단으로 존재하다가 진흥왕이 정식 청소년 수련기관으로 설립했다. 화랑은 청소년들의 훈련기관이자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기능하면서 점차 군사세력집단으로 발전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됐다.

◆신화전설: 법흥왕의 무사들
신라가 건국되기 이전에는 육부촌을 중심으로 부족단위 마을을 지키기 위한 사병들이 있었다. 이들 사병은 신라가 나라로 발전하면서 조금씩 군사조직으로 확대되었지만 귀족들은 저마다 사병들을 별도로 육성하고 있었다.
특히 지증왕은 왕좌에 올랐지만 군사조직 외에도 별도의 무사조직을 운영하고 있었고, 이들은 아들인 법흥왕을 호위하는 무사집단으로 이전됐다. 궁전을 보호하고 있는 군사 외에 법흥왕과 왕가를 보호하는 사조직의 성격을 지닌 사병들은 위화랑이 지휘했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면서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갖추어 가는 중심에도 이사부의 지원을 얻은 위화랑의 입김이 작용했다. 법흥왕은 어릴 때부터 학문과 무술을 비롯한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위화랑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위화랑의 건의를 받아들여 법흥왕은 왕가를 보호하는 무사집단을 강력한 세력으로 무장하고, 귀족들의 자녀들을 모집해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집단으로 양성했다.
진흥왕이 즉위하고, 이사부의 명을 받은 위화랑은 청년들로 조직한 군사집단을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 재편하고, 조직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해 전쟁에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기동대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진흥왕이 '개국'이라는 연호를 내세우며 친정을 시작할 때 이사부의 지원을 얻어 위화랑이 '화랑'의 창설을 건의해 본격적인 청년 군사조직으로 출범하며 거창한 발대식을 가졌다. 초대 풍월주의 지위에 오른 위화랑은 강력한 군사조직의 리더로 청년들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흔적: 임신서기석
화랑도는 신라의 청소년 수련집단이다. 15세에서 18세까지의 청소년들은 충과 효를 원칙으로 몸과 마음을 튼튼히 하고,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노래와 음악을 즐기는 가운데 집단의식과 인격을 길렀다.
원광법사는 화랑이 지켜야 할 규칙으로 세속오계를 만들었다. 세속오계에는 불교, 도교, 유교 세 종교의 영향이 담겨 있다. 화랑들은 삼국이 통일되는 과정에서 훌륭한 전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화랑에게는 관리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김대문의 화랑세기는 "훌륭한 충신들이 여기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들도 이로부터 생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치원이 화랑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난랑비'의 서문에도 "나라에 현명하고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 가르침의 근원에 대해서는 화랑의 역사를 기록한 책인 선사에 자세하게 쓰여 있다. 사실 풍류라는 것은 유교와 불교, 도교의 세 가지 가르침을 모두 따르고 있다. 이로써 모든 백성들은 함께 생활하면서 배우고 변화해야 한다"고 나타나 있다.
중국 당나라의 영호징은 "신라에서는 귀족의 아들들 중에서 아름다운 사람을 선발하여 분을 곱게 바르고 꾸미는데 이를 화랑이라 한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높이 받들어 모셨다"고 설했다.

◆스토리텔링: 화랑의 아버지 위화랑
위화랑은 날이군 파로군주의 아들이다. 벽화가 소지왕의 후궁이 되어 궁으로 들어올 때 위화랑도 누이를 따라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위화랑은 만 권의 책을 읽은 지혜의 샘이자 이사부로부터 지도를 받고, 꾸준한 수련을 통해 검술에도 특출한 실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이사부가 탁월한 재능으로 궁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주요한 직책을 맡게 되자 위화랑의 지위도 자연스럽게 지증왕의 아들 원종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자리잡게 됐다. 위화랑은 원종이 장차 왕위를 계승할 것을 예측하고, 누이 벽화를 원종에게 추천했다.
원종이 법흥왕으로 즉위하면서 위화랑의 지위도 자연스럽게 높아져, 왕사로 귀족사회에서도 인정을 받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위화랑은 귀족들의 자녀들을 중심으로 청년 군사조직을 결성해 왕가를 호위하는 사병조직으로 육성했다.

자연스럽게 궁궐 출입이 잦은 위화랑의 풍모에 반해버린 오도궁주가 취기로 산책하는 위화랑의 마음을 끌어 연인이 돼 버렸다. 이 때문에 법흥왕이 두 사람을 출궁시켜 버렸다. 갑자기 쫓겨난 위화랑은 도심에서 벗어난 산골에서 책을 읽고 검술 연마로 심신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다 오도궁주가 낳은 옥진이 날이 갈수록 미모가 빼어나 소문이 궁에까지 전해지고, 법흥왕의 부름을 받자 다시 위화랑도 법흥왕의 왕사로 복귀해 중요한 일을 맡게 됐다.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이 즉위하자 지소부인과 이사부가 위화랑을 불러 왕을 지원하는 일을 맡게 했다. 위화랑은 법흥왕 때부터 양성해 오던 청년 군사조직을 확대해 귀족자녀는 물론 전국의 훌륭한 자질을 가진 청년들을 선발해 화랑도를 창설하고 군사조직으로 키웠다.
위화랑은 초대 풍월주가 되어 화랑들을 하나하나 훌륭한 자질을 가진 인재로 키우면서 강력한 군사조직으로 발전시켜 삼국통일의 최고 선봉장으로 단련시키는 일에 매진했다. 위화랑은 청년들에게 먼저 학문을 익히게 하고, 음악과 예술, 그리고 무술을 연마하는 일에 매진하도록 담금질했다.
결국 화랑들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벗들과 신의를 지키고, 전쟁에서는 물러나지 않고, 살생은 가려서 하는 신라의 동량으로 성장하면서 큰 장군이 되기도 하고, 왕으로 즉위하는 인물이 나오기도 했다.
위화랑은 역사 속에 묻혀 있지만 결국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는 화랑도를 창설한 주인공으로 화랑의 상징, 화랑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Copyright © 대구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