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 없는 성관계’ 처벌 시작한 일본… 한국은?
한 아버지가 2017년 8월과 9월 당시 19살인 친딸을 호텔에서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의 선고공판이 2019년 3월26일 일본 나고야 지방재판소 오카자키 지부(지부는 한국 지방법원의 ‘지원’과 유사한 개념)에서 열렸다. 아버지는 딸이 중학교 2학년이 된 때부터 딸을 강간하는 등 성적 학대를 지속한 것으로 수사 결과 드러났다. 가해자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한 검찰은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성적 학대를 계속 받았고 가해자가 학비를 대신 내주고 있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저항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인 딸과 성교한 사실, 그리고 검찰이 공소사실로 밝힌 피고인의 성행위가 모두 피해자 의사에 반하는 행위였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피해자가 성교를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지배 복종 관계가 형성돼 있지 않았고, (사건 발생) 당시 피해자 상태가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였다고 보긴 어렵다’며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성폭력 무죄 판결이 일으킨 공분
일본 사회의 공분을 일으킨 판결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2019년 3월에만 3건이 더 있었다. 술에 취한 여성을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남성에게 ‘피해자로부터 성교에 대한 동의가 있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고 판단하고 무죄를 선고한 판결(후쿠오카 지방재판소 구루메 지부), 새벽 2시께 집 근처 편의점을 이용하고 나오는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남성에게 ‘폭행이 없었다’ ‘피해자의 소극적인 동의(묵인)가 있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죄가 없다고 본 판결(시즈오카 지방재판소 하마마쓰 지부), ‘가족이 잠든 상황에서 피해자가 소리를 내 저항했다면 누군가는 눈을 떴을 것’ ‘좁은 집 안에서 다른 식구가 몰랐을 가능성이 작다’ 등의 이유를 대며 12살 된 친딸을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아버지가 무죄라고 선고한 판결(시즈오카 지방재판소)이 나왔다.
성폭력 가해자를 강간죄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반항(항거)을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게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가해자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형법, 이에 따라 가해자에게 있는 힘껏 충분히 저항하지 않은 피해자는 피해자가 아니라는 판결에 시민들이 분노했다. 특히 여성들의 분노는 ‘플라워 데모’(Flower Demo)로 불리는 전국적인 시위로 나타났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한다(위드 유·WithYou)는 뜻으로 꽃을 들고 잘못된 법을 고쳐야 한다고 외쳤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고 침묵을 강요받는 반면, 많은 성폭력 가해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는 현실을 더는 지켜볼 수 없다는 여론이 고조되자 일본 정부와 의회가 움직였다. 여성들의 분노는 상대방 동의가 없는,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성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을 도입한 형법 개정안이 2023년 6월16일 일본 상원인 참의원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이처럼 일본 형법에 ‘부동의성교죄’(비동의강간죄 또는 비동의간음죄)가 도입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주도한 일본 시민단체 ‘스프링’(SPRING)활동가들이 2025년 4월15일 한국을 찾았다. 스프링은 성폭력 피해자의 얼어붙은 마음에 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주춧돌이 되어 2017년 7월 설립된 단체다. “형법 개정은 성폭력 피해로 힘들어하는 많은 분의 목소리를 토대로 이뤄졌습니다. 여기 한국에서도 (그와 같은)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 싶습니다.” 다도코로 유우 스프링 공동대표가 4월15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토론회 ‘강간죄에서 부동의성교죄로–일본 형법 개정의 의미와 과제’에서 일본 형법 개정 과정과 그 내용, 그에 따른 사회 변화를 참석자들에게 알렸다.
한국과 다르게 법 개정 나선 일본 법무성·의회
앞서 일본은 2017년 6월 형법을 한 차례 개정했다. 1907년 형법이 제정된 이후 110년 만에 성범죄 규정을 전면 개정한 이 법은 ‘강간죄’를 ‘강제성교 등 죄’로 바꾸고, ‘13살 이상의 여자’에서 ‘13살 이상의 자(사람)’로 피해자 범위를 확대했다. 또 ‘간음’만 처벌하던 범죄 유형을 ‘성교, 항문성교, 구강성교’(성교 등)로 넓혔다.
하지만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범죄 구성요건은 유지됐다. 데버라 터크하이머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프리츠커 로스쿨 교수가 쓴 책 ‘불신당하는 말’(교양인, 2023)을 인용하자면, 이 같은 형법에 내재된 논리는 명확하다. 가해자에게 육체적으로 저항하지 않은 고발인은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논리의 연장선에서, 저항하지 않는 여성과 강제로 성관계하는 남성에게는 책임을 묻지 못한다.
이에 형법의 추가 개정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거세졌다. 물론 ‘성행위 중에 폭행과 협박은 없었지만, 상대방의 동의가 없었고 상대방이 저항하기 어려웠다’며 성폭력 가해자에게 유죄를 선고한 판사도 있었지만, 피해자가 이런 판사를 만나는 것은 전적으로 운의 문제였다.
시민들이 분노하자 법무성(우리나라 법무부에 해당)이 형법 개정에 착수했다. 2020년 6월~2021년 5월 ‘성범죄에 관한 형사법 검토회’라는 회의를 개최했고, 이후 2021년 10월~2023년 2월에는 다음 단계인 법제심의회(한국 법무부 장관에 해당하는 ‘법무대신’의 자문기구로, 법무성 관할 법률 제·개정을 심의) 형사법부회를 열어 부동의성교죄 도입을 둘러싼 다양한 쟁점사항을 심의했다. 당시 심의 때 성폭력 피해 생존자도 참여해 목소리를 냈고, 스프링은 성폭력 피해자 5889명을 실태 조사한 결과를 법무성에 제출했다.그동안 비동의강간죄를 신설한 형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될 때마다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며 반대 의견을 밝혀온 한국 법무부와 대조적이다.
법무성은 검토회와 법제심의회 심의 결과를 토대로 부동의성교죄를 도입한 형법 개정안을 도출했다. 이 개정안은 2023년 5월 일본 하원인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전원일치로 가결됐고, 6월 참의원 본회의를 통과해 7월13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비동의강간죄 도입을 촉구하는 시민 목소리에 귀를 닫고, 비동의강간죄를 신설한 형법 개정안을 상임위원회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안 하는 한국 국회와 대조적이다.
제17대 국회(2004~2008년) 때인 2007년 강간죄를 ‘동의 없는 성적 행동’으로 규정한 형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 상정도 못 된 채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제20대 국회(2016~2020년)에서 발의된 비동의강간죄 신설 형법 개정안 10개도 일부(1개)는 법사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고, 상정된 나머지 법안(9개)도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심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제21대 국회(2020~2024년)에는 비동의강간죄를 도입한 형법 개정안이 3개 발의됐다. 그러나 법안심사소위에서 딱 한 차례 논의되고 폐기됐다. 제22대 국회(2024~2028년) 임기 시작 이후에는 2025년 4월17일을 기준으로 비동의강간죄를 신설한 형법 개정안은 아직 발의되지 않았다.
판례 1300여 건 분석해 정리한 가해 유형 8가지
기존의 ‘강제성교 등 죄’를 ‘부동의성교 등 죄’로 바꾼 일본의 2023년 개정 형법은 상대방이 성행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형성·표명하거나, 상대방이 그런 부동의 의사를 형성·표명하기 곤란한 상태가 되게 하거나, 상대방이 그런 곤란한 상태에 있는 것을 이용해 성교 등을 한 사람을 처벌하도록 했다.
해당 법은 이처럼 상대방이 부동의 의사를 형성하거나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가해자의 행위를 8가지로 열거하고 있다. △상대방을 폭행 또는 협박 △잠들게 하거나 그 밖에 의식이 명료하지 않은 상태로 만듦 △상대방에게 심신장애 유발 △알코올 또는 약물을 복용하게 함 △거절할 틈을 주지 않음 △공포심을 느끼게 하거나 경악하게 함 △학대에서 기인하는 심리적 반응 유발 △경제·사회적 불이익을 우려하게 함이 그것이다. 이 8가지와 ‘유사한 행위’도 처벌 대상이다. 이는 법무성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강간(준강간 포함) 사건 판례 1300여 건을 수집해 분석, 정리한 범죄 유형을 바탕으로 했다.
다도코로대표는 “(상대방이) ‘노’(No)라고 확실하게 부동의 의사를 말하지 못했더라도 그런 부동의 의사를 형성하거나 표현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인정될 경우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독일의 ‘노 민스 노’(No Means No, 상대방이 부동의 의사를 ‘표명’했는데도 성관계로 나아간 경우에 이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법 규정”이라고 말했다.
법 개정 과정에서 반대 의견이 없지는 않았다. ‘부동의라는 것은 내심(속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입증이 어렵고, 상대방의 무고로 억울한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제기되는, 막연하고도 뚜렷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이런 우려는 구체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하는 건설적인 논의를 가로막는다.
다도코로대표는 “성폭력 피해 실태를 법에 정확히 반영한 결과로서 상대방의 의사가 성행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요건을 법에 명시했다”며 “입증이 어렵다는 비판은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부동의성교죄 도입 논의 과정을 연구한 배미란 울산대 교수(법학)는 “(법에서) ‘부동의’라는 용어를 활용하고는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해자의 행위로 인하여 성립하는 범죄이지,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 성립 여부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배미란 교수 말처럼 일본의 부동의성교죄는 ‘피해자 마음대로’ 처벌하는 범죄가 아니다. 법에서 열거한 8가지 행위 또는 그와 유사한 행위를 해서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성행위를 한 사람을 처벌하는 범죄다.
법 개정에 따른 변화는 눈에 나타났다. 2024년 기준 성폭력 사건 검거율과 기소율이 전년보다 각각 62.9%, 78.4% 늘었다고 한다. “전보다 (강간죄) 구성요건이 명확해졌기 때문에 경찰이 성폭력 가해자를 수사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는 의견이 있었다”고 다도코로대표가 전했다. 그는 이어 “피해자들도 ‘동의 없는 성행위는 성폭력이고 처벌 대상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법 개정이 있었기 때문에 용기를 내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많이들 말씀하신다”고 말했다. 그동안 가해자의 성폭력에 저항했다는 증거를 신체에 남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즉 ‘피해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침묵하고 고통을 삼킬 수밖에 없던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경찰에 피해 사실을 신고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성관계, 명시적 동의가 기준이다
‘성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전진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노 민스 노’ 모델에 머물러 있는 일본 형법을 ‘예스 민스 예스’(Yes Means Yes), 즉 상대방의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성관계 동의 의사’가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성관계로 나아가면 이를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로 바꾸는 것, 그리고 성범죄 공소시효를 폐지 또는 연장하는 것이 향후 과제다. 다도코로 대표는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 행위에 직면했을 때 두려움, 놀람, 당혹감 등으로 몸이 굳어 가해자의 성폭력에 저항할 수 없게 된다. 가해자가 무신경해서 그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상대방이 성행위에 동의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변명하면, 즉 (강간의) 고의가 없었다고 주장하면 ‘가해자가 피해자의 부동의 상태를 인식하고 있었는지 의문이 남는다’고 보는 판사에 의해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행위자가 상대방의 동의를 명확히 확인하도록 하고 그러지 않으면 처벌받게 하는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상대방의 동의 여부를 어떻게 아느냐고 말하는 사람들, 특히 남성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책 구절이 있다.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교양인, 2018)을 엮은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장은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진짜 동의를 했는지 어떻게 알지? 물어보면 된다.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어떻게 하지? 마음이 바뀌면 그만두면 된다. 여자가 먼저 하자고 했는데 남자는 그만두기 어렵지 않나? 그렇지 않다. 원치 않는 성관계라면 얼마든지 그만둘 수 있다. 상대가 마음이 바뀌었으면 그만두어야 한다. 섹스의 원칙은 간단하다. 싫다고 하면 즉시 그만두어야 한다. 동의를 강력한 기준으로 여긴다면, 강간 여부를 판단할 때 복잡할 것이 없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참고 문헌
배미란, ‘비동의간음죄와 인권감수성-주로 한국과 일본의 논의를 중심으로-’, ‘비교형사법연구’ 제25권 제2호, 한국비교형사법학회, 2023
배미란, ‘일본의 부동의성교죄 도입 논의에 관한 검토-주로 법무성 법제심의회의 심의사항을 중심으로-’, ‘법학연구’ 제64권 제4호, 부산대 법학연구소, 2023
장응혁, ‘일본 개정형법의 비동의간음죄에 관한 검토’, ‘경찰법연구’ 제22권 제1호, 한국경찰법학회,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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