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은 시민이 만든 결과, 특정 정당의 승리 아냐”
내란 세력의 맹활약 덕분에 윤석열 파면 뒤 펼쳐진 조기 대선판에는 정책 논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 파면된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 중인 한덕수는 ‘헌법재판관 알박기’를 시도하고 국민의힘 원내대표인 권성동은 “뉴스타파는 지라시”라며 기자에게 폭력까지 행사하니 그 기막힌 당당함에 ‘내란 종식’ 너머로 의제가 확장되기 어려운 지형이다. 응원봉 광장에 나온 시민들의 목소리는 ‘빛의 혁명’이란 화려한 수식 속에 갇히고 말 것인가?
‘정권교체 넘어선 정치’ 어디에
“8년 전에 촛불 혁명을 이뤘지만 문재인 정부가 광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많이 반영하지 못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5년을 하고 정권을 뺏긴 측면이 있다는 얘기를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많이 했다. 당 지휘부도 그런 이야기에 공감했다. 그래서 이제 만약 우리가 민주 정부를 만들어서 정권을 다시 찾아서 수립한다면 광장의 목소리, 시민단체의 목소리들을 수렴해서 정책에 많이 반영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 이야기를 했다.”
2025년 4월17일 오전 9시30분,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하 비상행동)이 8개 정당(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진보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노동당·녹색당·정의당)과 공동으로 연 정책토론회에 참석해 이런 ‘축사’를 남겼다. 김 의원은 다른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박찬대 민주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를 대신해 참석한 참이었다.
1700여 개 시민단체가 모여 비상계엄이 선포된 밤 이후 120여 일 동안 광장 집회를 주도했던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윤석열 파면 뒤 단체 이름을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으로 바꾸고 12개 분야에서 개혁과제 118개, 세부과제 424개를 뽑아내 이날 8개 정당과의 정책토론회를 시작으로 ‘광장 목소리의 정책 의제화’를 위한 간단치 않은 여정에 나섰다.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6시30분까지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하루 종일 끝장 토론을 하는 방식이었다.
민주당을 제외한 7개 정당에서는 모두 당대표가 참석해 ‘정권교체를 넘어선 정치’를 이야기했다. 김선민 조국혁신당 대표 권한대행은 “정권교체는 세력교체로 끝나선 안 된다”며 “응원봉 시민의 요구를 정치와 정책으로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창민 사회민주당 대표는 “우리 민주공화국이 위협에 처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사회에서 토론과 숙의가 실종돼왔기 때문”이라며 “촛불혁명으로 탄생했던 촛불정부의 실패가 결국 윤석열이라는 괴물 정권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대표는 “다가오는 대선은 단순한 정권교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회·경제·정치 전 영역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상현 녹색당 대표는 “윤석열 계엄 이전에도 삶이 이미 계엄이었다는 시민들의 요구를 무겁게 받아안아, 정권교체를 넘어 진정한 정치와 삶의 변화를 이루기 위해, 사회 대개혁은 반드시 실현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백윤 노동당 대표는 “친위군사쿠데타 주범 윤석열로 인해 광장이 더 크게 열렸고 그 목소리가 함께 모인 곳에서 들렸을 뿐 노동자 시민들의 삶에, 투쟁의 현장에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목소리는 계속 있었다”며 “윤석열을 잉태한 불평등 구조는 그대로 놔둔 채 부자 감세나 재벌 중심의 성장주의를 만지작거리는 정치는 개혁의 대상이지 개혁의 동반자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토론하자”고 제안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주자 중 유일하게 토론회에 참석한 권영국 정의당 대표는 “비상행동은 시작부터 지난 박근혜 퇴진 광장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데 마음을 모으고 출발했고 광장 시민들은 자유 발언으로, 나눔으로, 연대로 각자가 바라는 세상을 보여주었다”며“책임 있는 정치세력이라면 비상행동의 12가지 세상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12가지 세상이란 비상행동이 정리한 12가지 과제를 뜻한다. 비상행동은 ‘다시 민주공화국 시민이 주인 되는 세상’ ‘정의로운 경제와 민생이 안정된 사회’ ‘평화·주권·역사정의가 실현되는 사회’ ‘기후위기 너머 정의로운 생태사회’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한 돌봄 중심 사회’ ‘좋은 일자리와 보편적 노동권이 보장되는 사회’ ‘생명·안전이 지켜지는 세상’ ‘모두의 존엄과 공존을 위한 성평등·인권 사회’ ‘언론·정보통신·문화의 공공성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식량주권과 먹거리가 보장되고 지역이 살아나는 세상’ ‘교육과 청(소)년의 삶에 평등을 여는 세상’이란 11가지 사회 대개혁 과제에 특별과제로 ‘내란의 완전한 종식과 헌정질서 회복’을 더해 12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정치개혁에서 비례성·다양성 필요”
“윤석열 퇴진 후 사회 대개혁을 핵심 목표로 설정한 이유는 8년 전 촛불항쟁의 결과 촛불 정부를 표방하며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촛불 연대나 촛불 동맹의 길을 버리고 대신 촛불항쟁의 성과를 독식하면서 결국 윤석열 검사 독재 정권을 만들어내고 말았던 뼈아픈 역사적 교훈을 성찰했기 때문이다.” 축사에서 이렇게 말한 박석운 비상행동 공동의장은 이후 한겨레21과 만나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고, 명운을 걸고 정책 연합을 해낼 것”이라고 말했다.
본격적인 토론에 들어가자 비상행동에서 11개 소위원회를 꾸려 사회 대개혁 과제를 정리해온 시민사회 인사들의 발제를 중심으로 각 정당과의 토론이 이뤄졌다. 비상행동이 제안하는 개혁과제 118개, 세부과제 424개에 대해 각 정당이 수용 여부와 의견을 밝히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우리 ‘다시 민주공화국 시민이 주인 되는 세상’ 소위원회는 27개 단체에서 파견한 활동가로 구성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토론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제로 10가지를 꼽았는데 첫 번째 과제는 공직 선출의 비례성과 대표성을 강화하자는 것이다.”(이태호 참여연대 운영위원장) “민주당에서도 비례성 강화에 대한 국민의 인식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지난번 위성정당 문제로 그 의미가 퇴색된 측면이 있다. 향후에는 국민 뜻에 부합하는 현명한 방안을 만들어가야 되겠다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김현정 민주당 의원) “정치개혁에서 비례성과 다양성이 필요하다, 이 정도의 키워드는 좀 민주당이 이렇게 노력하겠습니다 답을 해야 하는데 이런 노력이나 태도 없이 대통령 선거를 어떻게 치르실 것인지 약간 염려가 된다.”(윤복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이날 토론회는 정치, 경제·민생, 사회 분야로 나눠 진행했다. 정치 분야 토론의 좌장은 윤복남 민변 회장이 맡았고 이태호 참여연대 운영위원장, 최은아 자주통일평화연대 사무처장, 서채완 민변 사무차장이 발제를 맡았다. 토론에는 김현정 민주당 의원,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 조민경 진보당 정책실장, 신지혜 기본소득당 최고위원, 김보경 사회민주당 사무총장, 장혜경 노동당 정책위의장, 장혜영 전 정의당 의원이 함께했다.
경제·민생 분야 토론은 이의영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의 주도로 김은정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남우근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권혁주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의 발제가 이어졌다. 2부로 나눠 진행한 사회 분야 토론은 최희연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와 양이현경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가 각각 좌장을 맡았고 전은경 참여연대 사회인권팀장, 수영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상임활동가, 유승현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 이경석 환경정의 사무처장, 박한희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공동대표, 김선우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 사무처장이 발제에 나섰다.
차별과 혐오의 정치를 넘어서자
대선판에 광장의 목소리를 의제화하는 시도가 시작됐지만 우려도 크다. ‘교육과 청(소)년의 삶에 평등을 여는 세상’ 소위원회를 맡았던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는 “이번 대선은 내란 종식이라는 부분에 맞춰져 있고 정권 창출이냐 재창출이냐의 구도로만 주로 보도돼 정책 선거가 되기 어려운 구조”라며 “광장에서는 시민들이 이 사회에 있는 수많은 윤석열들을 호명하면서 다른 세상을 요구했지만 이런 요구를 담을 정치적 그릇이 있는가, 되레 정당들이 선거에서 중도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며 달아날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지현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선거를 치르는 정당 입장에서는 자기 후보가 당선되는 게 목표일 수밖에 없지만 엄청나게 시민들이 힘을 보태서 이뤄진 일을 단순히 우리 정당만의 승리로는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며 “최소한 광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차별과 혐오의 정치를 넘어서자’는 대의에 동의한 뒤 함께 방법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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