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전에 ‘지브리화’ 내다봤나…하야오 “마법으로 만든 건 의미 없어”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5. 4. 20. 16:27
[씨네프레소-152]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챗GPT로 인물 사진을 애니메이션 풍으로 바꾸는 것이 유행인 가운데, 하필 스튜디오 지브리 스타일이 가장 인기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설립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기 작품을 통해 노동에서의 인간성 회복을 주장해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창작자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최근의 ‘지브리화’ 유행을 미리 내다본 것 같은 인상도 있다. 대표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을 통해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애니 프사 제작 열풍을 어떻게 생각할지 간접적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탐욕을 부리다 돼지가 돼버린 부모
이 영화는 ‘탐욕’과 ‘절제’의 대립으로 읽을 수 있다. 주인공 치히로는 성인들의 탐욕으로 얼룩져 병든 세상을 목도하지만, 본인은 자기 것이 아닌 음식이나 재물엔 절대 손을 대지 않으며 어른들과는 다른 절제를 보여준다. 이 구도는 작품의 도입부부터 드러난다. 이사를 하게 된 치히로의 가족은 우연히 신들의 세계에 발 들이게 되는데, 여기서 부모는 주인이 없는 식당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다가 신들에게 벌을 받아 돼지가 된다. 부모가 음식을 권함에도 꿋꿋이 거절했던 치히로만 사람의 형상으로 지낼 수 있게 된다.
온천장을 운영하는 마녀 유바바는 치히로를 고용하면서 소녀의 이름을 뺏는다. 치히로는 자기 이름을 잊은 채 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온천장엔 치히로 외에도 이름을 잃은 채 살아가는 인물이 또 있다. 하쿠라는 이름을 갖고 유바바의 심부름을 하는 소년이다. 아마 소년 소녀 외에도 온천장의 많은 인물은 자기 본명이 아닌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그들이 유바바를 위해 일하는 대가로 무엇을 받는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노동에서 소외되는 자본주의 사회 인간의 모습을 묘사한다. 분명 우리가 소비하는 상품과 서비스에는 치히로와 하쿠의 땀이 들어가 있지만, 우리는 온천장을 그저 ‘유바바’라는 브랜드로 인지할 뿐이다. 유바바가 노동자에게 일의 대가로 주는 건 생존의 보장이다. 유바바는 자기 말을 듣지 않는 노동자를 언제든 돼지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닌 인물인데, 열심히 충성한 노동자에겐 그렇게까지 하진 않는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먹을 걸 주고 잠자리도 내준다. 자본이 이름을 빼앗긴 노동자의 수고로 몸을 불릴 동안, 근로자가 보장받는 건 겨우 ‘죽지 않을 수준의 의식주’인 셈이다.
대다수의 어른은 이 구조에 만족했다. 가급적 더 편안한 잠자리를 얻고, 맛있는 걸 더 먹을 수 있다면 괜찮다고 여겼다. 치히로는 달랐다. 소녀는 자기 정체성을 계속 고민한다. 비록 자기 이름이 지워진 노동일지언정 최선을 다해 개성을 드러내려 한다. 손님을 돈으로 보지 않고 같은 인격체로 존중한다. 처음엔 인간 냄새가 난다며 외면받던 치히로가 온천장의 핵심 인재로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이다. 영화에는 이처럼 불합리한 조건에서 생존을 도모하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갈구하는 시선이 드러난다. 자기 이름과 부모를 찾기 위한 치히로의 모험이 궁금하면 OTT에서 확인해보시길.
왜 하필 지브리였을까
다시 현실로 돌아와 최근 ‘지브리풍’ 트렌드를 살펴보자. 왜 수많은 애니메이션 중 하필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AI 이미지 변환의 중심에 섰을까. 그건 연필을 활용한 수작업을 고집해온 미야자키 하야오의 철학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챗GPT로 자기 얼굴을 3D 애니메이션으로 바꾸는 건 그렇게까지 신기하지 않다. 3D와 CG는 원래 기계의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땀이 들어간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에서 느꼈던 충격이 ‘지브리화’에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세돌 9단의 패배를 보며 많은 이가 놀랐던 것은 바둑이 인간 고유의 ‘암묵지’를 활용하는 영역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인간만 발휘할 수 있는 직관이 바둑에 존재한다고 믿었는데, 알파고는 바둑조차 AI가 더 잘할 수 있는 영역임을 보여줬다.
자기 얼굴을 지브리풍으로 바꾸는 걸 이토록 신기하게 여기는 이가 많은 이유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장인의 고유한 터치가 들어간 연필화마저도 AI가 더 신속하게 할 수 있는 영역임을 우리는 바라보고 있다. 지금은 이미지이지만 앞으로는 서사를 비롯한 모든 영역으로 AI가 확장할 것이다. ‘가장 창의적인 것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라는 말조차도 무색해질지 모른다. ‘가장 개인적인 것’조차도 AI가 모방할 수 있는 시간이 언젠가 올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마법으로 만든 건 의미 없어” 의미 생각해볼 때
그러니 우리는 자기 이름이 지워지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할 때다. 스튜디오 지브리 정도 되는 창의성의 절대 강자조차도 스스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베껴지고 있다. 지브리조차도 그렇다면, 일반 대중의 지식과 경험은 말할 것도 없다. 개인이 인생을 투입해서 쌓아온 노하우는 지금 우리도 모르는 채 AI에 의해 복제되고 있다. 치히로가 이름을 되찾길 바라며 영화를 보던 우리는 어느새 이름이 빼앗긴 ‘센’이 돼가고 있는 셈이다.
영화의 말미엔 AI가 모든 것을 베껴가는 이 시대에 우리가 새겨볼 만한 대사가 나온다. 그건 마녀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인 제니바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치히로의 매력에 빠진 제니바는 굳이 머리 끈을 직접 만들어서 소녀에게 건넨다. 친구들이 직접 뽑은 실로 만든 머리 끈이다. 머리 끈 정도는 주문 한 마디로 뚝딱 만들 수 있었을 제니바는 “마법으로 만든 건 의미 없어”라고 말한다. AI로 뭐든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인간 고유의 창의성과 노동을 어떻게 인정받을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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