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썰] 자립의 문턱부터 막힌다…홀로서기의 조건 '문해력'
신진 기자 2025. 4. 20. 06:00
아홉살 보배(가명)는 지난겨울 한글을 깨쳤습니다. 초교 입학 때부터 한글을 줄줄 읽던 또래 친구들보다 많이 늦었습니다. 여전히 책 읽는 건 싫습니다. 어려운 말이 나오면 머리가 아프다고 합니다. 그래도 읽고 쓸 줄 알게 되어 좋다는 보배. 뭐가 좋은지 묻자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어서”라고 답했습니다.
아홉살 아이에게 소통이란 무엇일까요. “편지를 쓰고 읽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로 하기 부끄럽지만 꼭 드러내고 싶은 속마음이 있나 봅니다. 쓸 줄 몰라 답답했을 보배의 마음이 애처로웠습니다. 그토록 전하고 싶은 말, 누구에게 하고 싶은 것일까요.
"엄마요. 집에 있는 사람 중에 엄마가 제일 좋으니까. 키워주셔서 고맙다고 편지를 쓸 거예요."
여기서 엄마는 위탁부모, 집은 보육시설을 말합니다. 보배는 첫 생일 즈음 부모와 떨어져 순천의 한 보육기관으로 왔습니다. 부모의 학대 때문이었습니다. 보배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곳의 선생님이 보배에겐 엄마입니다. 이날 방 밖에서 인터뷰를 듣던 '엄마'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무리 사랑을 줘도 모자랐는데, 공부도 많이 못 봐줬는데. 잘 커줘서 고마워요.”
보호시설 아동 상당수 문해력 심각한 저하...자립 걸림돌
문해력, 누군가에겐 학습의 문제가 아니라 생사존망의 문제입니다. 베이비박스에서 발견되거나, 학대 등의 이유로 분리되어 시설에서 머물고 있는 아동들에게 특히 그렇습니다. 학교 적응은 물론, 사회에 나가 일자리를 얻고 문화생활을 하는 등 광범위한 삶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면 기관을 나와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보호대상 아동들, 자립청소년들에겐 문해력으로 통칭하는 해득 능력이 생존을 위한 최소 조건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은 문해력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문해 환경'을 이해해야 한다며 불편한 진실을 말합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위치, 문화적 차이가 많은 영향을 준다는 겁니다. 초교 교장 은퇴 후 함평의 한 보육원에 문해력 수업 봉사를 다니고 있는 최종호 선생님은 이렇게 분석합니다.
“문해력은 초등학교 1학년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그 뿌리가 결정되어요. 문해력이라는 것은 부모의 대화, 책이나 영상 등 각종 매체 등 다양한 자극을 통해 길러집니다. '문해 환경'이 좋은 아이일수록 언어 능력이 발달하고, 그 능력은 곧 읽고 쓰는 능력과 연관이 되지요. 읽기가 안 되는 아이들은 책을 접하는 기회가 적고, 그러다 보면 어휘력과 배경 지식 습득이 늦어지고, 결국 격차가 생깁니다. 연구에 따르면 유치원 한 교실에서도 그 격차가 5년까지 난다고 합니다.”
익명을 요청한 순천 보육시설 교사 A씨는 “솔직히 대부분의 시설 아이들이 한글을 떼지 못하고 학교에 들어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글을 모르니 수업 시간이 지루하고 재미없어 부적응하게 되고, 낙인찍히면서 악순환이 벌어진다”라고 털어놨습니다. 그는 그다음이 더 문제라고 했습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자격증 등을 취득해야 자립을 하는데, 실기 능력을 충분히 갖췄어도 필기시험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운전면허 필기시험조차 떨어지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NGO 단체인 희망친구 기아대책이 전직 초교 교사 등과 함께 진행한 조사 결과는 이런 현실을 뒷받침합니다. 지난해 10월부터 12월까지, 양육시설 5곳의 아동 75명을 조사했습니다. 대학병원, 소아정신과에서 주로 활용되는 난독증 검사(CLT-R) 를 활용했습니다. 그 결과 52%가 난독증으로 나타났고 24%는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위험군으로 드러났습니다. 정상 범주는 24%, 18명에 불과했습니다.
연구를 진행한 김중훈 다양한학습자를위한 공동대표(전 초교 교사)는 “영유아와 같은 생애 초기에 아이들이 받은 학대와 방임은 심리적, 정서적 어려움뿐 아니라 인지발달에도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 같다. 뉴질랜드 등에서도 비슷한 연구 결과가 나온 바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문제는 어린 시절 문해력 격차로 인한 많은 차이가 성인기까지 지속된다는 겁니다. OECD 조사에서 문해력은 취업률과 연봉, 심지어 건강에도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참고 기사 : "실기 잘해도 필기 시험서 번번이.." 자립준비청년 '더 막막한' 이유
https://news.jtbc.co.kr/article/NB12243206?influxDiv=JTBC
"조기 개입하면 놀라운 속도로 개선"
이런 연구 결과를 두고 자칫 낙인효과를 우려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오래 봐온 전문가들은 그래서 더 공론화하여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김중훈 대표는 “낙인효과를 우려해 숨기고 감출 게 아니다. 아이들이 겪는 내재적 어려움, 자립 시점에 홀로 직면할 더 큰 어려움을 생각하면 숨기고 감추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다행인 점은, 아이들은 흡수가 매우 빠르다는 점입니다. 최종호 교사는 “전문가가 조기에 개입하면 격차를 눈에 띄게 줄일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여러 사례를 예로 들었습니다.
“현직 교장일 때 일입니다. 다문화 가정인데다 부모가 식당을 하느라 동생들까지 돌봐야 했던 초교 2학년이 있었어요. 문해 환경이 열악하고 한글 습득 기회를 놓쳐버렸죠. 너무 안타까워서 따로 한글을 가르치도록 했더니 한 학기만에 평균 수준의 읽기 능력을 갖추더라고요. 최근 어떻게 자랐나 물어보니 동화책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큰 보람을 느꼈지요.”
그는 보육원에서 만난 중학생 등을 떠올리며 “이 아이들이 전문성을 갖춘 선생님을 일찍 만났더라면 뒤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라고 했습니다.
“한글을 해득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단순히 학업성취도 차원이 아니에요. 학교 나오기 싫어하던 아이가 어느새 반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학생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요. 현직에 있을 때 1학년 아이의 한글 해득도 도운 적 있습니다. 교우관계가 크게 개선됐습니다. 급식시간에 밥 먹으러 가는 모습을 유심히 봤어요. 그 아이가 표정이 가장 밝고 즐겁더군요.”
기아대책과 함께 2022년 2월부터 보호대상아동을 위한 기초 문해교육 사업을 시행하고 있는 김중훈 대표도 실제로 큰 변화를 목격했다 했습니다. 그는 “사업 초기 많은 아이가 한글을 해득하지 못했지만 몇 년 지난 지금 유창하게 읽고 이해하며 어려운 독해 문제를 공부한다. 지적장애가 심해 읽기를 포기했던 아이들도 지금은 놀랍도록 잘 읽는다. 아이들이 성장하고자 하는 힘은 어른의 상상 이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참고 기사 : "아이들 표정부터 달라져요"…'문해력 전도' 나선 퇴직 교사
https://news.jtbc.co.kr/article/NB12243204?influxDiv=JTBC
"공교육 시스템 부족...수많은 아이들 교육적 '방치'"
전문가들은 이런 아이들을 공교육이 효과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좀 더 이른 시기부터 아이들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개별화된 문해교육을 제공해야 하는데 그런 시스템이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순천 보육원의 A교사는 “학교에선 '다 안다'는 전제로 가르친다. 우리 아이들은 아예 따라가지도 못하고, 계속 격차가 생기니 속상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나라별 특수교육 대상자 비율을 뜯어보라고 조언했습니다. 우리나라 특수교육대상자는 2024년 기준 전체의 2% 수준입니다. 그 중 지적장애(51.8%)가 가장 많고 나머지는 자폐성 장애(16.4%), 지체장애(9.3%) 등입니다. 미국과 캐나다 등 선진국으로 일컫는 곳들은 특수교육대상자가 10%가 넘습니다. 난독증 등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포함시키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특수교육 대상자는 2023년 기준 전체의 약 15%인데, 그 중 학습장애(37%)의 비중이 압도적입니다. 진단하고, 선별하고, 개별학습하는 시스템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김중훈 대표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상한 나라입니다. 특수교육 대상자 중 학습 장애가 사실상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굉장히 많은 아이들이 자기가 왜 공부가 어려운지, 왜 학교에 부적응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어느 국가나 발달적으로 읽기가 어려운 아이들은 5~10% 정도 존재하거든요. 교육청이나 교육부는 '한 명도 포기하지 않겠다'라고 하던데 과연 사실일까요? 제가 볼 때 굉장히 많은 아이들이 교육적으로 방임, 방치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이것은 낙인이 아니라 한 학생의 자립 역량을 위한 필수적 조치라는 점을, 취재진이 만난 관계자들은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기아대책 임팩트사업팀 임수진 팀장은 “문해력이라는 것엔 골든타임이 있어 저학년에 개입을 빠르게 했을 때 발전 가능성이 높은데 민간에서 포괄적으로 지원을 하기엔 쉽지 않다”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보호대상아동이 매년 4000여명씩 나오는데, 우리는 200여명을 지원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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