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빈, 치열하게 다가서고 격렬하게 껴안은 '하이퍼나이프' [인터뷰]
아이즈 ize 한수진 기자

비단결처럼 단정한 얼굴로 배우 박은빈은 수없이 많은 인물을 지나왔다. 어린 시절 순수한 모습의 아역으로 시작해, 청춘의 들뜸과 아픔을 치밀하게 감싸안은 '청춘시대', 애달픈 금기를 끌어안은 '연모', 국민적인 신뢰를 얻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그리고 디즈니+ '하이퍼나이프'에서 그가 꺼내든 새 얼굴은 이력에 또 하나의 방점을 찍는다. 피와 살기, 충동과 본능이 교차하는 인물. 그가 연기한 정세옥은 생명을 살리는 동시에 서슴없이 죽이는, 단 하나의 통제도 허락하지 않는 야생마였다.
"이번 작품은 이미지 탈피를 염두에 두고 선택한 건 아니었어요. 전 늘 새로운 걸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선택하는 편인데, '하이퍼나이프' 역시 그랬죠. 더 신기했던 건 제작사에서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하는' 이 작품의 로그라인을 보고 저를 떠올렸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이 역할을 하면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이 날 것 같았다고요. 그게 되게 재미있었어요. 저로서도 상상 못 한 조합이었거든요. 그래서 대본을 읽고 더 끌렸어요. 해볼 만하겠다 싶었죠."
이끌림은 단지 대본에만 있지 않았다. 세옥이라는 인물은 박은빈에게도, 그리고 시청자에게도 난생처음 마주하는 성정이다. 그는 감정을 절제하지 않고, 충동으로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박은빈은 세옥을 누구보다 격렬하게 제 것으로 끌어안았다.
"전 캐릭터를 이해하고 나면 친구처럼 느껴요. 연기를 하다 보면 그 인물의 세계를 점점 이해하게 되고, 그걸 제 안에 두게 되거든요. 세옥이도 마찬가지였어요. 처음엔 이 인물이 어디로 튈지 몰라서 어렵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이해하게 됐어요. 심리학을 전공한 덕분에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특성 같은 걸 조금은 구조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고요. 사이코패스라고 단정 짓고 싶진 않았어요. 저는 이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이해하고 싶었고, 그게 가능해야 연기를 할 수 있어요."

'하이퍼나이프'는 세옥과 그의 스승 최덕희(설경구)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메디컬 스릴러다. 작품은 둘의 단순한 선악 구도가 아닌, 서로를 파괴하고 동시에 필요로 하는 극단적 애증으로 격동한다.
"설경구 선배와는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특히 후반부 대본이 늦게 나왔던 터라 우리가 이 인물들을 어떻게 끝낼 건지 방향을 합의하는 게 중요했어요. 저는 이 관계가 애초부터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표현하는 감정도 상식적으로 흘러가선 안 된다는 것엔 이견이 없었죠. 대신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으면 했어요. 사실은 굉장히 단순한 이야기인데, 관계가 복합적이라 시청자들이 어렵게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배우로서 전달을 잘 해보자고 마음을 맞췄어요."
특히 마지막 회인 8부 후반부, 세옥이 양경감을 살해한 후 덕희와 마주하는 장면은 이 드라마가 달려온 정점이다. 그는 "'하이퍼나이프'는 이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기까지 달려왔구나 싶었다"라고 말할 정도다.
"그 장면을 찍을 때 물리적으로 힘들었어요. 해가 뜨기 전에 다 찍어야 했거든요. 드라마 전체가 이 장면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드라마가 지닌 세옥과 덕희의 아리송한 관계성과 드라마가 무슨 감정을 말하고 싶은 건지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었던 신이었죠.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했어요."
박은빈은 감정을 극단으로 끌고 가는 신에서 오는 감정의 파열음을, 그저 배우의 숙명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장면이 세옥이라는 인물의 궤도 위에서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이 있었기에 자신도 끝까지 붙잡고 연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은 연기적으로 힘들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어요. 설경구 선배와 주고받는 호흡에서 오히려 도파민이 솟았달까요. 그런데 그게 희열인 동시에 걱정이기도 했어요. '내가 이 감정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껴도 되는 걸까?' 하는(웃음)."
'연기'라는 단어에 박은빈은 '이해'라는 감정을 겹쳐 말한다. 단순히 대사를 외우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조적으로 탐구하고 해석하는 일. 그렇기에 그는 지금까지 맡아온 수많은 캐릭터를 "친구"라고 말한다. 단순한 역할 수행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내면을 공유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전 캐릭터를 이해하고 나면 친구처럼 느껴져요. 제 여러 방 안에 그 친구들이 같이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오늘로써 세옥이를 시청자들께 보내드릴 수 있다는 게 후련하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해요. 제가 품고 있었던 친구를 누군가도 좋게 생각해 주는 것. 그게 가장 감동적인 일이죠."

그의 연기 방식에는 단단한 내면의 지문이 깔려 있다. 인물에 대한 판단이나 가치 평가 이전에, 이 인물은 왜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는다. 그런 태도가 있었기에 박은빈은 악역에 가까운 세옥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았다.
"악행에 대한 변명을 하지 않는 인물이잖아요. 저는 그래서 오히려 세심하게 인물 성장에 신경을 썼어요. 인간이니까요. 충동적이고 독선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그 속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 이유를 찾아내야만 연기할 수 있어요."
박은빈은 "저는 천재도 아니고, 극단적인 노력형도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기대와 오해를 경계하고, 그저 성실히 뚜벅뚜벅 걷는 사람일 뿐이라고. 박은빈의 연기는 성장이 아니라, 축적이라는 단어에 가깝다. 어릴 적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신뢰와 내공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고, 그건 단발적인 재능의 폭발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일관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마다 기준의 역치가 다르다고 생각해요. 저는 저의 게으름도 잘 알고 있어요. 다만 그걸 인정하면서도 꾸준히 살아가고 있는 게 제 방식인 것 같아요. 연기력이라는 게 항상 선형적으로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때론 정체된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훅 올라가요. 그걸 저는 계단식 성장이라고 봐요. 그런 순간들을 믿고 연기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박은빈의 연기는 늘 기대보다 신뢰에 가깝다. 반짝이는 선택보다 조용한 몰입, 드라마틱한 반전보다 단단한 누적. '하이퍼나이프'는 그 신뢰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야생의 충동조차 품어내는 이 배우는, 이제 어떤 얼굴을 꺼내든 결국 설득해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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