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년간 찾아온 악성민원인 마음 연 권익위 특별민원팀
이들은 대책 없는 민원을 '악성민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분노와 집착 뒤에 숨어 있는 절박함과 사연을 보듬고자 '특별민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이들은 15년째 전국 곳곳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민원을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 있다. 매해 300건 넘는 특별민원을 단 3명이 응대한다. 공직 기피 현상이 심화하는 요즘, 가장 기피되는 사람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칼 든 민원인도 2시간이면 잠잠해져
"작은아버지, 다른 데다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아. 나한테만 전화하라니까. 밥은 먹었어? 밥도 안 먹고 나오고 말이야. 그러면 건강 다 상해."특별민원팀에서 10년 넘게 근무한 이용범 특별민원전문관은 전국에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가 적잖다. 실제 가족은 아니지만 그는 특별민원인을 가족처럼 부른다. 1942년생인 이종사촌의 나이를 기준 삼아 그보다 나이가 많으면 이모·삼촌, 적으면 누님·형님이라고 칭한다. 자기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없던 진정성도 생긴다는 게 그의 민원 응대 철학이다.
그렇게 10년간 이 민원전문관이 만난 민원인만 2000명이 넘는다. 상담 횟수는 6000건에 육박한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도 민원을 넣는다. 조상 묘 인근 나무를 잘랐다는 이유로 법령을 샅샅이 뒤져가며 지방 감사실부터 국가수사본부까지 줄줄이 민원을 제기한 대학교수 출신 민원인도 있었다.
이 같은 강성 민원을 상대하는 특별민원팀의 노하우는 처음 만나는 민원인을 대할 때 '매우 반갑게' 맞는다는 것이다. "작은아버지,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라며 뛰어가서 민원인을 안아주기도 한다. 적게는 몇천 번, 많게는 몇십만 번 민원을 넣던 사람도 특별민원팀과 만나면 평균 2시간 만에 마음의 문을 연다. 꾸준한 관리가 필요해 보이는 민원인에게는 주기적으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 "작은엄마, 이 원수덩어리. 내가 전화하라고 했잖아. 가족도 없으면서…. 돌아가시면 송장 처리는 내가 해줘야 할 거 아냐." 애정 어린 잔소리는 덤이다.
언제나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전동차에 불을 지르겠다는 협박을 반복하던 셰프 출신 민원인은 생선 손질용 칼을 들고 이 민원전문관을 위협했다. 그러자 이 민원전문관은 "이 세상에서 형님을 도울 사람은 나 한 명뿐인데 그런 사람을 죽이면 이제 형님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야"라며 "그래도 나 죽일 거야?"라고 으름장을 놨다. 그의 말에 민원인은 칼을 내려놨다.
"우리 부서 소관 아니다"를 끊자
민원은 해마다 끊이지 않는다. △2019년 3만8054건 △2020년 4만6079건 △2021년 5만1833건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2021~2023년 집계된 악성민원은 13만 건이 넘는다. 이들을 최전선에서 만나온 이 민원전문관은 현 행정 시스템이 오히려 민원인의 억울함을 키운다고 설명한다.가장 먼저 문제로 지적한 건 민원 창구의 분산이다. 중앙행정기관 39개 부처가 각기 민원 창구를 운영 중이고, 전국 오프라인 민원실과 지방자치단체, 교육청까지 합하면 수천 개에 이른다. 민원을 제기해도 곧바로 처리되기보다 여러 기관을 전전하는 일이 많다. 민원인은 창구를 오가며 공무원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키운다.
특별민원팀으로 이관됐던, 귀가 잘 안 들리는 80대 왕 씨 사례가 그 전형이다. 왕 씨는 이웃이 대형 상가 건물을 신축하면서 자신의 토지를 침범했다며 민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고령에다 청력 문제까지 있어 큰 목소리로 말하는 왕 씨의 이야기를 끈기 있게 끝까지 들어준 공무원이 없었다. 왕 씨는 구청·시청·검찰청·법원·대통령실 등 민원 창구 20여 곳을 전전했다. 특별민원팀이 그를 만났을 땐 이미 민원 '핑퐁'에 지쳐 공무원에 대한 불신이 깊은 상태였다.
이 민원전문관은 현 민원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관별로 고질·악성민원만 전담하는 공무원을 따로 두자는 제안이다. 아무도 하지 않을 것 같다고 기자가 말하자 "그렇지 않으면 고통받는 공무원만 계속 늘어날 뿐"이라고 답했다. 악성민원은 폭언·협박, 대량 정보공개청구 등으로 여러 부서와 다수 공무원이 연쇄적으로 휘말리는 경우가 많은데, 현실적으로 담당 업무가 따로 있는 공무원이 처리하기는 어려워 결국 민원인은 "내 소관이 아니다"라는 말만 반복해서 듣게 된다는 것이다. 민원 전담 공무원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민원 처리에 번거로운 절차나 규제를 면제한다면 일처리가 수월할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이런 일을 자원해서 하려는 사람이 있을까. 이 민원전문관은 공직자의 사명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공무원은 "국가를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이 일반 직장인보다는 조금씩은 더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해마다 민원 대응 교육을 나가보면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는 공무원들이 아직은 있다고 덧붙였다. 누군가는 국민의 목소리를 끝까지 들어야 하기에 특별민원팀은 오늘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종=윤채원 기자 yc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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