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났으니까, 만난 적 없는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어 [.txt]

썰물과 밀물, 제주와 육지 사이
소방관 된 시인과 음악가 사이
숱한 ‘사이’에 사라지지 않는 시 한편
이 시를 읽으면 왕왕 피(P)와 헤어질 무렵의 기억이 뒤미처 온다. 5년 전 이맘때, 나는 P와 제주의 사계 해안가를 걷고 있었다. 날이 풀려서 하늘도 바다도 파랬다. 우리는 산방산과 한라산과 바다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금쯤 걸었을 때 P는 조개껍데기를 몇개 주워 동전 지갑에 담았다. 천진한 얼굴로 막대기를 줍더니 쪼그려 앉아 뭔가를 끼적였다. 희망.
“안녕, 희망!”
P는 말했다. 왜 희망에게 인사하느냐고 나는 물었다. P는 희망을 저 바다로 흘려보내는 거라고 했다. 그래야 언젠가 희망이 밀려오니까. 무심한 나는 그런 희망이라면 마음에 품는 게 어떠냐고 했다. P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고 있으면 아프니까, 잠깐 저 멀리 보냈다가 나도 모르게 밀려왔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파도 거품에 눈을 주었다. 희망이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사라질 때까지. 우린 손을 잡고 있었다. 글자는 이내 사라졌다. P는 이날 늦은 오후 비행기로 제주를 떠났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 뒤로 서울에서 한 번, 제주에서 한 번 만나고 연락이 끊어졌다.
나는 시를 쓰고 P는 음악을 했다. 그 당시 나는 제주에, P는 서울에 살았다. 현실적으로 우린 너무 먼 거리에 있었다. 현실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서로 틈을 내어 서울과 제주를 오가면 되지 않겠냐고 P는 말했지만, 나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라고 했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라고. 이때가 소방관이 된 지 두어 달쯤 됐을 때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슬슬 나는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했다. 먹고사는 일에 전념하기로 한 것이다.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P는 여전히 수입이 없고, 음악 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을 이어갔다. P와 나눴던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도 나는 어쩔 수 없다고만 여겼다. 현실, 현실 앞에서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고. 우리는 여기까지라고. 나는 나의 길, 너는 너의 길이 있다고. 좋은 글, 좋은 음악으로 서로 위로하자, 좋은 예술가가 되자던 맹세는 단념한 채.
5년 전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그 뒤로 나는 사계 해안가를 무수히도 걸었다. P와 손을 잡고 걷던 그 언저리를 홀로 맴돌았다. 그때마다 바람이 불었다. 밀려오는 파도를 밀어내는 것처럼 보일 만큼 맵찬 바람이었다. 그러나 파도는 어김없이 밀려왔다. 모래알이 반짝였다. P가 적은 “희망”이라는 글자는 온데간데없었다. 밀려온 것은 희망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너무 깨끗해서 미간을 찌푸려야 했던, 차마 마주하기 싫은 눈부신 현실 말이다. 그럴수록 나는 먹고사는 일에 골똘했다. 시(詩)도 열심히 썼다. 시 또한 희망과 작별하고 현실과 조우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P를 잊나 싶었다.
한번은 P를 꿈에서 본 적이 있다. P는 서글퍼 보였고 어깨가 처져 있었다. 슬펐다. P의 노래가 슬퍼서가 아니었다. 이 무대에 P와 나 말곤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P의 떨리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꿈속의 나는 박수를 칠 수 없었다. 그때 내가 P에게 했던 말은 사랑의 속삭임이 아니라 돈 없는 예술가를 향한 값싼 적선의 말이었던가. 생활이 어렵던 내가 한창 소방관을 준비할 때, P는 진심을 다해 응원해주었건만 나는 P에게 무엇도 거슬러주지 못했다.
지난해 2월, 본가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근무지를 옮긴 것이다. 죽을 때까지 서울에 눌러앉을 생각이었다. 무작정 우이천 근처에 원룸을 구했다. 밤의 우이천을 거닐다 문득 P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잘 지내냐는 둥, 그때 조개껍데기를 아직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둥, 말을 이어가 보면 어떨까. 나도 시집을 출간한 어엿한 시인이라고 너스레를 떨어볼까.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실개천은 교교히 흘렀다. 가버린 건 다시 밀려오지 않았다. 포털을 뒤져보니 P는 2022년에 이피(EP) 앨범을 내고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다. 나는 천변을 따라 무작정 걷다 따분해져서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나의 길을 걷기로 했다. P는 P의 길을 걷겠고.
아, 그 시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제 그 무엇도 아닌 ‘사랑’을 들을 차례. 작가들이 숨어 애송하는 연애시의 내막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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