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아니면 죽음을" 외쳤던 '미스터 션샤인' 실존 인물

2025. 4. 19. 00:1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16〉 임시정부 외교관 황기환
“한국인들이 피를 흘리는 것은 한국인들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절대적인 독립을 얻기 위한 것이다.” 황기환 선생이 프랑스 신문 ‘라 쁘띠 리퍼블리크(La Petit Republique)’와 인터뷰한 내용 중 한 대목이다.

황기환 선생은 1886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천주교 신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세례를 받았고, 18세 되던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6년 공립협회 레드랜드 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공립협회는 민족운동단체로 1905년 안창호 선생 등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됐고 미국 서해안 일대 9개 지회에서 800여 명의 회원이 활동했던 단체다. 선생이 수학했던 학교와 관련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실존인물로 알려진 유럽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인물 황기환(黃玘煥). [사진 국가보훈부]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자 선생은 미군 지원병으로 입대해 유럽 서부전선에서 미군 병사들에 대한 구호활동을 담당했다. 1918년 미국은 군에 입대한 외국인이 빠른 귀화절차로 시민권을 획득하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한 바 있으나 선생이 수혜를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종전 후 선생은 김규식의 제안으로 파리로 옮기면서 조국광복을 위한 활동에 나서게 된다.

1919년 1월 제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영국·미국·프랑스 주도로 30여 국가 대표들이 참여하는 파리강화회의가 열렸고, 이 결과 그해 6월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된다. 독립운동가들은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한국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 했고 상해에서 창립된 독립운동단체 신한청년당은 1918년 10월 파리회의에 김규식을 한국 대표로 파견키로 한다. 1919년 3월 김규식은 파리에 도착했고, 그해 4월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는 김규식을 외무총장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위원 겸 대한민국 파리주재 한국대표부 대표위원을 맡도록 했다. 1919년 6월 파리에 도착한 황 선생은 파리 한국대표부 서기장으로 임용되어 활동했고, 파리강화회의 폐회 후 한국대표부가 임정의 파리위원부로 전환되자 위원부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파리 한국대표부 서기장으로 활동
2023년 4월 10일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주기장에서 열린 ‘황기환 애국지사 유해 영접행사’에서 국방부 의장대가 유해를 운구하고 있다. [사진 공항사진기자단]
그해 9월 임정 대통령에 선임된 이승만은 파리위원부와 미국 필라델피아 대한민국 통신부를 통합해 구미위원부를 조직했고 김규식을 위원장에 선임했다. 김규식이 8월에 파리를 떠난 후 남아있던 부위원장 이관용에게 위원장 직무를 대리토록 했으나 이관용도 10월에 사임해 버리고 황 선생이 위원장 직무를 대리하면서 홀로 파리위원부를 이끌게 되었다.

선생은 1919년 8월 프랑스 신문사 ‘라 쁘띠 리퍼블리크’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일본 행정 철수와 일본이 강탈한 권한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이양하는 것이 한국인이 요구하는 것이며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주장했다. 이 인터뷰는 일제의 강압정책과 한국의 처참한 실상을 유럽사회에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1920년

1월 파리지리연구회에서 개최한 한국문제 대연설회를 통해서도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잔혹한 탄압 상을 밝혔다. 1920년 2월 뉴욕헤럴드 파리지부와의 인터뷰에서는 “한국문제는 한국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한국인의 요구는 절대독립으로 어떠한 강압도 한국인의 기백을 꺾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편, 구미위원부는 미국에서 한국 독립문제에 대한 여론을 불러일으켜 나가던 중 1920년 5월 파리위원부를 런던으로 옮겨 구미위원부의 런던지부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로써 유럽에서의 외교·홍보활동 중심이 파리에서 런던으로 이동하게 됐다. 선생은 파리위원회 폐지를 반대하던 입장이었으나 그해 9월 임정으로부터 런던위원부 위원으로 임명됐다.

런던 부임 직후부터 선생은 ‘한국친우회’를 창립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민주주의의 원천인 영국의 도움을 호소했고, 런던의 자유교회·세례교회 등 기독교계에도 한국이 일제로부터 처하고 있는 참상을 알렸다. 이후 구미위원부가 비용문제 등을 들어 런던사무소를 폐쇄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이승만은 선생에게 런던에서의 임무수행을 적극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임정의 내부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선생은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대유럽 홍보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20년 5월 잡지 ‘자유한국(La Coree Libre)’ 제1호를 프랑스어와 영어로 발행해 유럽의 언론기관과 주요 인사들에게 보냈다. 이 잡지는 ‘우리의 목적은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서문에서 밝혔고 이듬해 5월 13호까지 발간된 바 있다. 그해 12월 파리위원부의 대유럽 외교활동을 한인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국한문책자 『구주의 우리사업』도 간행했다.

선생은 런던에서 기독교 단체들을 통해 한국의 참상을 호소하던 중 영국을 방문 중인 일본 왕자 히로히토 암살음모혐의로 런던 경찰에 소환당하기도 했다. 1921년 4월 『영일동맹과 한국』이란 서적을 편집해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정책에서 비롯된 것임을 비판했다. 그해 6월 영국에서 대영제국 식민지수상회의에 참석한 각국 수상들에게 ‘일본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조선사람의 청원’을 배포했고 프랑스에서는 한국친우회 결성식에서 서툰 프랑스어로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짧지만 인상적인 연설을 했다. 선생은 홍보활동에 동분서주하는 가운데에서도 러시아 무르만스크에 체재하던 한국인 노무자들이 일본에 강제 소환되는 것을 필사적인 노력으로 막아 35명을 프랑스로 이송토록 했고 유럽의 한국인 유학생 지원 활동에도 발 벗고 나섰다.

런던과 파리에서 동분서주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선생은 구미위원부 이승만의 요청으로 워싱턴회의 준비를 지원하기 위해 1921년 8월 미국으로 향했다. 워싱턴회의는 1921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미·영·중·일 등 9개국이 참여해 군비축소와 동아시아에서 열강들 사이의 질서를 재편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개최된 회담이다. 워싱턴회의를 위해 온 한 일본 의원이 일본 신문과 지식계층에서는 한국이 독립하도록 할 뜻이 있다는 연설을 하자 선생은 즉석에서 “그러면 당신이 일본의회에 한국독립 안을 제출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고 그 의원은 자리를 피해버렸다 한다. 워싱턴회의에서 한국 문제는 주목받지 못했다.

순국 100년 만에 국적 찾고 조국 귀환
1919년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단. 2열 맨 오른쪽이 황기환 선생이다. [사진 독립기념관]
선생은 구미위원부 일원으로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외교와 홍보활동을 계속해 나가던 중 1923년 4월 향년 37세의 나이로 뉴욕의 한 병원에서 심장병으로 순국했다. 그의 유해는 뉴욕 소재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안장 85년 만인 2008년 뉴욕한인교회의 장철우 담임 목사가 교인명부에서 선생의 이름과 묘지명을 확인하고 공동묘지에서 선생의 묘소를 처음 발견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2013년 한인교회의 요청을 받은 국가보훈처는 실사단을 파견해 유해를 봉환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선생의 유족이 없었으므로 파묘·봉환은 법원의 승인이 있어야 했는데 공적자료 확인이 되지 않아 승인은 지지부진하게 됐다.

2018년 7~9월 중 TV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방영되면서 주인공 ‘유진 초이’와 비슷한 삶을 살았던 선생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일어나자 국가보훈처는 2019년 유해 국내 봉환을 결정했다. 그러나 미국 법원 절차 등으로 계속 지연되다가 2021년 뉴욕총영사관이 다시 나서 묘지 측, 뉴욕시 보건청·법원·의원 등과 협의 끝에 2023년 2월 유해 봉환이 결정되었다. 이후 뉴욕총영사관과 한인사회의 노력 끝에 모든 절차를 마무리한 후 뉴욕한인교회에서 추모식을 하고 뉴욕경찰, 대한항공, 미국교통안전청 등이 협조해 선생 사후 100년 만인 2023년 4월 10일 유해가 한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선생은 일찍이 해외로 이주했고 결혼도 하지 않았으므로 무적 상태였으나 유해봉환과 함께 가족관계 등록이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유럽·미국 등 낯선 환경 속에서 조국독립을 외치며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던 선생은 순국 100년 만에 그리던 조국의 국적을 찾게 되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현재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석동의 한민족 DNA를 찾아서』가 있으며, 오랜 경제전문가로서 직장인들의 팍팍한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가성비 좋은 서울의 노포 맛집을 소개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