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시작되는 GS아트센터 개관 페스티벌 첫 공연인 미국 ABT발레단의 ‘클래식에서 컨템포러리까지’ 중 최신 레퍼토리인 젬마 본드의 ‘라 부티크’. 다양성과 대중성을 중시하는 미국 발레의 최신 트렌드를 보여주는 무대다. [사진 GS아트센터]
18일 유니버설발레단 ‘지젤’로 불붙은 올 발레 시즌은 유난히 메뉴가 풍성하다. ‘지젤’은 마린스키 발레단 입단 예정인 전민철과 ‘빌리 1호’ 임선우의 ‘알브레히트 데뷔’로 핫하고, 국립발레단은 5월 강수진 단장의 현역시절 대표작 ‘까멜리아 레이디’ 아시아 초연으로 승부한다. 서울시발레단도 5월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자 요한 잉거의 대표작 ‘워킹 매드’‘블리스’ 아시아 초연으로 컨템포러리 트렌드를 이어간다.
미국 ABT발레단과 영국 로열발레단, 두 ‘파인다이닝 맛집’의 자존심 대결에도 눈길이 쏠린다. 역삼동 구 LG아트센터 자리에 24일 개관하는 GS아트센터와 지난 25년간 첨단 공연예술을 소개해 온 LG아트센터의 대결이기도 하다. 각각 미국과 영국 발레를 대표하는 위상으로, 개별 무용수들의 갈라 참여 외에 발레단 차원 내한 공연은 각각 13년, 20년 만이다.
로열발레단은 7월 나탈리아 오시포바, 바딤 문타기로프 등 수석무용수 8명과 한국인 퍼스트 솔리스트 전준혁 등 20여 명이 ‘더 퍼스트 갈라’로 찾아온다. ‘백조의 호수’ ‘해적’ 같은 고전부터 웨인 맥그리거, 조슈아 융커 등 현대무용가들의 신작까지 다양한 2인무와 3인무의 향연이다. 특히 스트리트댄스에 기반한 혁신적인 안무를 하는 조슈아 융커의 세계 초연작이 관전 포인트다.
'백조의 호수'를 추는 박선미. [사진 Rosalie O’Connor]
총공세를 펴는 건 ABT발레단이다. 16명의 수석무용수를 포함해 총 70명의 무용수가 24일부터 4일간 5회의 ‘클래식에서 컨템포러리까지’ 공연을 펼친다. ABT는 영화배우로 활약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등 스타를 대거 배출해 ‘발레계 할리우드’라 불리는데 이자벨라 보일스톤, 카산드라 트레너리, 데본 토셔 등 간판스타와 수석무용수 서희, 안주원과 솔리스트 한성우, 박선미 등 한국 무용수의 활약도 직관할 수 있다.
'In the Upper Room' 을 추는 서희. [사진 Kyle Froman]
‘경계 없는 예술, 경계 없는 관객’을 모토로 적극적인 장르 파괴를 표방한 GS아트센터의 개관 공연이 ‘발레’라는 클래식 장르라니 모순 같지만, ABT 프로그램을 뜯어보면 미국 발레 융합의 역사 그 자체다. 장인주 무용평론가는 “전통적 레퍼토리를 우선하며 우아함과 섬세함을 강조하는 로열에 비해 ABT는 컨템포러리와 다양성에 적극적”이라며 “공연장 특성도 반영했겠지만 이번 프로그램은 컨템포러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국내 발레계에 좋은 자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발레는 뭐가 다를까. 정옥희 무용평론가는 “ABT는 창단 때부터 유럽식 고전의 최고를 보존하는 동시에 새로운 전통, 즉 미국의 개념과 정신의 기초를 마련한다는 가치를 중시하며 ‘춤의 박물관’을 지향해 왔다”면서 “풍요롭고 다채로운 뷔페식당”에 비유했는데, 4개의 소품과 ‘잠자는 숲속의 미녀’ ‘실비아’ 등 다양한 2인무 시리즈를 회차마다 조금씩 다르게 맛볼 수 있다.
'주제와 변주' 중에서. [사진 Rosalie O’Connor]
시그니처 디시는 ‘미국 발레의 아버지’ 조지 발란신의 ‘주제와 변주(1947)’다. 동명의 차이콥스키 관현악 모음곡 3번 마지막 악장에 맞춰 19세기 황실 발레를 20세기적으로 계승해 ‘잠미녀의 조카’로 불린다. 신생아 수준이었던 미국 발레가 고전적 형식에 현대적 에너지를 결합해 개척한 네오클래식 발레의 대표작이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전통적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이 12개의 변주를 시각화하는데, 두 주역의 파드되로 시작해 24명의 솔리스트들이 끊임없이 변주를 이어가며 복잡성을 더해간다. 발란신 특유의 정교하고 까다로운 테크닉을 복잡한 동선 위에 빠르게 펼치다 웅장한 군무로 매듭짓기까지 무용수들은 숨돌릴 틈도 없다. 바리시니코프가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어려웠던 작품으로 꼽을 정도다.
'백조의 호수'를 추는 서희. [사진 Gene Schiavone]
발란신의 네오클래식이 고전발레의 변주라면, ‘미국 무용계의 여왕’ 트와일라 타프는 현대무용 언어로 고전발레의 성역을 무너뜨렸다. 비치보이스 음악에 맞춰 최초의 크로스오버 발레를 만드는 등 실험적이면서도 대중성 있는 작업으로 장르 융합의 정점을 보여주고 무용의 저변을 넓혔다. 대표작 ‘In the Upper Room(1986)’은 내러티브 없는 ‘미국식 미니멀리즘의 정수’로 꼽힌다. 미니멀리즘 음악의 선구자 필립 글래스가 작곡한 반복적이고 몽환적인 음악도 발레 음악의 틀을 깨고 현대성을 확장했다. 줄무늬 점프슈트와 흰 운동화, 새빨간 토슈즈 등 엉뚱한 조합의 의상을 겹쳐 입은 무용수들이 복싱·탭댄스·요가 등 다양한 움직임을 융합하면서 에너지가 고조된다. 그림자·포그·스포트라이트를 활용해 무대에 깊이를 주는 조명 디자인도 1991년 런던 공연 당시 올리비에상을 수상할 정도로 존재감이 크다.
지난해 10월 초연한 더블빌 ‘라 부티크’와 ‘머큐리얼 선’의 대비도 흥미롭다. ‘라 부티크’는 ABT 발레리나 출신 젬마 본드가 마시네의 단막 발레 ‘라 부티크 판타스크’(1919)를 세련되게 재해석한 무대다. 수은의 차갑고 변덕스러운 속성을 은유한 ‘머큐리얼 선’은 컨템포러리 그 자체다. 요즘 가장 핫한 현대무용가 카일 에이브러햄이 불규칙한 전자음악 사운드 위로 정형화된 발레 동작들을 자유로운 흐름에 녹여 낯선 감각을 만들어낸다.
'머큐리얼 선' 중에서. [사진 Emma Zordan]
2인무 시리즈도 고전을 넘어선다. 정옥희 평론가는 ‘네오’와 ‘그레이트 갤로핑 고트샬크’를 추천했다. 80년대 전성기 대표작인 ‘그레이트…’는 재즈와 모던댄스의 요소가 혼합된 스타일로 경쾌하며 자유로운 미국적 정서가 듬뿍 묻어난다. 2024년 공연된 최신작 ‘네오’는 ABT 상주 안무가 알렉세이 라트만스키가 이자벨라 보일스톤과 제임스 화이트사이드를 위해 테크닉을 풀가동한 작품. 정 평론가는 “샤미센 라이브 연주가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두 댄서가 고도의 테크닉으로 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낸다. 관습적인 제스처나 내러티브적 장치를 모두 제거하고 오직 신체의 역동성과 상호작용으로 춤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ABT의 얼굴이 된 서희와 라이징스타 박선미의 무대도 관전 포인트다. 특히 박선미는 로열 발레와 ABT가 공동제작한 크리스토퍼 휠든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2023), 웨인 맥그리거의 ‘울프 웍스’(2024) 등 주요 신작에 연거푸 낙점되며 요즘 가장 핫하다. “가냘프고 우아한 모습 속에 강렬한 열정과 강인함이 숨어 있다. 드라마틱 발레리나로서의 훌륭한 자질”이란 게 휠든의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