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 아니었으면 우린 다 죽었데이” 산불서 어르신 구한 이방인 [따만사]
그날 밤 평화롭던 어촌은 지옥으로 변했다. 바람을 타고 몰아친 불길은 뒷산을 넘어 작은 포구 마을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3월 25일 밤 10시경 경북 영덕군 축산면 경정3리 밤하늘이 검붉게 물들었다.
늦은 밤이라 마을은 고요했고, 일부 주민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포탄처럼 날아든 불씨는 가파른 산자락 비탈길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시골집 처마와 마당 등으로 떨어졌다.
“할매여 불 불!” “할매 어디갔어요?” “빨리 나오소 빨리!!” 청년의 외침은 절박했다. 언덕의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문을 ‘쾅쾅’ 두드렸다.
그 시각 마을 꼭대기 근처에 살던 80대 할머니는 막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안토 씨는 할머니를 들쳐 업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비상 대피 방송은 여러 차례 울려 퍼졌지만, 귀가 어두운 어르신들은 듣지 못했다.
그냥 걷기도 힘든 비탈길 300m…업고 달렸다 |
“처음에는 전기가 나가길래 초를 찾아가 불을 붙이고 침대에 이래 앉았는데, 저 아가 막 와가 ‘할매 빨리 나오소. 저 뒤에 불납니더’ 이래 하면서 나를 막 업어 데리고 갔다. 안 그랬으면 내 죽지 않았겠나. 아가 참 착하다. 오며 가며 항상 인사하고.”
기자가 안토 씨를 만나 인터뷰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유종락(92) 할아버지도 말을 보탰다.
안토 씨는 숨이 턱턱 막히는 경사로 연기 속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골목 골목을 뛰어다니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안고 업고 내려와 그나마 안전한 방파제에 데려다 놨다. 300m가 넘는 거리를 몇 번이고 오갔다.
마을은 결국 잿더미가 됐지만 주민 한 명도 생명을 잃지 않았다. 모두 안토 씨와 어촌계장의 헌신 덕분이었다. 어르신들을 업어 나른 인물은 안토 씨와 함께 사는 어촌계장 유명신 씨도 있다.
“맨날 울었어요” 스물셋 청년의 한국살이 8년 |
인도네시아에서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마트 점원, 음향 장비 대여, 오토바이 수리 등 다양한 일을 하다가 한국행을 결심했다.
고향에서 한국어 공부를 조금씩 배운 그는 취업 비자를 받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어촌에서 마을 사람들과 배를 타고 고기 잡는 일이었다.
한국에 처음 발을 내디딘 건 한파가 몰아치는 12월이었다. 생전 처음 겪는 추위에 말도 통하지 않아 매일 아침 눈물로 하루를 시작했다.
“처음 눈을 봤을 땐 진짜 신기했어요. 막 사진 찍어서 가족들한테 보냈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고향이 너무 그리웠어요. 뱃멀미가 너무 심해서 바다에 나갈 때마다 괴로웠어요. 매일매일 가족이 보고싶어서 아침에도 울고 저녁에도 울고…그때가 스물세살이었어요. 엄마가 그랬어요 ‘3년만 참아봐라’ 그생각 하면서 버텼어요.”
다행히 마을 어르신들의 따뜻한 관심 덕에 한국살이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말은 안 통했지만 정은 통했다.
“이제 한국사람 다 됐어요” 큰 선물 준 한국에 감사 |
안토 씨가 주민을 구한 사연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해경과 수협에서 포상했다. 법무부에서 좋은 체류 자격도 줬다.
원래 안토 씨는 2년 후에 비자가 만료돼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고국에는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그리고 아내와 5살 아들이 있다.
가족들은 이번 산불 소식을 접하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안토 씨는 마을에 통신이 끊겨 불 난지 3일 만에 가족과 연락이 닿았다. 머나먼 타국 땅에서 가장이 죽을 뻔했다는 소식에 가족들은 적잖이 놀랐다.
안토 씨가 새로 얻은 받은 비자는 언제든지 고국과 한국을 왕래할 수 있고 가족도 초청할 수 있다고 했다.
‘영덕 대게와 김치’를 사랑한다는 안토 씨는 한국에 더 머무를 수 있게 해준 정부에 감사하사다고 했다. 아직 한국에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가족도 언젠간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안토 씨는 “지금은 한국사람 다 됐어요. 말하는 것도 어렵지 않고. 고향에도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낼 수 있게 돼서 너무 기쁘고 감사해요. 가족들도 한국 정부와 국민들께 너무 감사해하고 있어요”라고 전했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박태근 기자 pt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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