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사람에 적응했는데.. ‘허브’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편집자주
시민들이 안타까워하며 무사 구조를 기원하던 TV 속 사연 깊은 멍냥이들.
구조 과정이 공개되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지금은 잘 지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가족을 만났다면 어떤 반려생활을 하고 있는지,
보호자와 어떤 만남을 갖게 됐는지, 혹시 아픈 곳은 없는지..
입양을 가지 못하고 아직 보호소에만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새 가족을 만날 기회를 마련해 줄 수는 없을지..
동물을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이라면 당연히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며 궁금해할 것 같습니다.
궁금한 마음을 품었지만 직접 알아볼 수는 없었던 그 궁금증, 동그람이가 직접 찾아가 물어봤습니다.
“왜 자꾸 제 발 뒤로 숨는지 모르겠네요. 부끄러운가?”
지난 9일, 경기 남양주시에 위치한 동물자유연대 ‘온센터’에서 만난 반려견 ‘허브’(13)와 산책을 나가던 중이었습니다. 처음엔 잘 걷던 허브 주변에 가까이 가자 허브는 곧 함께 걷던 돌봄활동가 발 뒤로 몸을 숨기는 듯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해 경계심이나 공격성까진 아니었지만, 다소 겁을 먹은 듯 긴장한 표정도 엿보였습니다.
그러나 긴장은 잠시였습니다. 이내 허브는 긴장을 풀고 종종걸음으로 바깥을 누비기 시작했습니다. ‘허브’라고 부를 때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부르는 활동가를 바라보다 다시 걷는 귀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허브가 온센터에서 지내는 곳은 ‘노견정’. 직관적인 이름 탓에 어떤 개들이 모여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생기는 편견과 달리, 개들은 활력 넘치게 외부 사람을 반겨줬습니다. 자신을 안아달라고 격정적으로 파고들고, 마음껏 얼굴을 핥으려 하는 개도 있었습니다. 마치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노래라도 부르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나이만 조금 들었을 뿐 사람의 손길을 원하는 마음은 노견이라고 해도 다를 리 없습니다. 그 노견 중에서도 허브는 온센터 터줏대감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허브가 동물자유연대와 인연을 맺은 시점은 무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어쩌다 허브는 이렇게 오랫동안 보호소에서 머물러야 했던 걸까요?
강아지 공장의 '악성 재고'.. “사람은 피하기만 했어요”
지난 2015년, 경기 남양주시에 위치한 한 비닐하우스. 거미줄이 겹겹이 쳐진 뜬장 위에서 날카롭게 짖는 개들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오랫동안 치우지 않은 배변 냄새는 코를 찌르고 들어올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전형적인 ‘강아지 공장’, 그 자체였습니다.
방송을 통해 강아지 공장의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전이었기에, 상태는 상상 이상으로 열악했습니다. 더군다나 팔리지 않는 개들 탓에 운영난을 겪고 있던 번식장 주인은 사료조차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허브는 이곳에서 수년간 갇혀 지냈습니다. 그러나 구조 전까지 허브가 어떻게 해서 이 번식장까지 오게 됐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품종이 명확하지 않은 혼종견이라는 허브의 특징을 봤을 때, 이 번식장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희가 추정하기로는 아마 처음부터 번식장을 운영하려고 준비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개를 식용 목적으로 도살하려고 했었는데, ‘반려견 경매장에 팔면 돈이 된다’는 얘기를 어딘가에서 듣고 번식장을 같이 운영했던 것 같아요.
조영연 동물자유연대 온센터 동물관리국장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개들이 번식장 밖으로 나갈 방법은 없었습니다. 번식장 주인이 경매장에서도 이 개들을 팔지 못하고, 수년간 방치된 겁니다. 돈을 벌지 못했으니, 자연스럽게 개들의 복지도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도 동물을 돈벌이 수단으로밖에 보지 않았으니, ‘악성 재고’ 취급받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결국 폐업을 앞두고 있다는 번식장 주인을 설득한 동물자유연대는 이곳의 77마리를 전부 구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허브에게도 다른 가족을 만날 기회가 찾아온 겁니다. 그러나 조영현 국장은 당시 허브를 구조하면서 조금 걱정이 들었다고 합니다.
구조 때부터 사람에 대한 경계가 심했어요. 사람 손길을 보면 도망 다녔고, 잡히면 대소변을 지릴 정도로 극도로 예민했었죠. 그러다 보니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니나 다를까, 입양 순서가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점점 뒤로 밀려버리고 말았죠.
조영연 동물자유연대 온센터 동물관리국장
"이제야 사람 믿기 시작했는데.. 너무 늦진 않았기를"
그렇게 어느덧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습니다. 사람의 손에 적응하는 시간을 거친 허브는 점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무던해졌습니다. 지금처럼 최애 활동가를 기다리며 환하게 미소 짓기도 하고, 봉사자들이 챙겨주는 밥도 잘 받아먹을 정도가 되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이에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렸습니다. 방송을 보며 강아지 공장에 분노하고, 번식장 출신 강아지들을 입양하는 행렬도 옛날이야기고, 허브 역시 사람이 안고 계단을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나이가 들어버렸습니다. 지난 겨울부터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디스크 탓이라고 합니다.
더군다나 허브의 입양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이유는 바로 여전히 존재하는 강아지 공장 탓이 큽니다. 비록 동물생산업 허가제가 도입되고, 과거보다 규제가 엄격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허가받은 번식장의 이름만 빌려 불법 번식을 일삼는 곳이 넘쳐나는 게 현실입니다. 실제로 지난 2월, 동물자유연대는 충남 보령군의 한 불법 번식장에서 124마리를 구조하기도 했습니다.
법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는 불법 번식장은 여전해요. 게다가 요새는 보호소 간판을 내걸고 펫숍 영업을 하는 ‘신종 펫숍’까지 있잖아요. 인적이 뜸한 외곽 지역으로만 가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일일이 다 단속하지 못해요. 게다가 적발이 된다고 해도 처벌이 미약하다 보니 벌금보다 높은 수익을 기대하면서 그냥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거죠.
조영연 동물자유연대 온센터 동물관리국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동가들은 허브가 가족을 만날 희망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2년 전에는 활동가 한 사람이 허브를 데리고 반려동물 동반이 가능한 호텔도 방문하며 즐거운 하루를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번식장과 보호소가 세상의 전부였던 허브에게 잊지 못할 새로운 경험이었을 겁니다.
사람을 믿는 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믿을 만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모습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날 잠시 만난 허브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해 봤지만, 허브가 믿고 따르는 활동가가 부르지 않고서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허브이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는 기대감도 남는 게 사실입니다. 어쩌면 여생, 반려인만을 바라보며 살 것만 같은 반려견이 될 것 같다는 기대감 말입니다.
허브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보는 게 현실적이죠. 그만큼 강아지와 그 지병에 대해 잘 알고 계신 분이 입양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 노화에 따른 경제적인 부담도 고려 대상일 텐데 저희가 그 부분은 충분히 돕겠습니다. 이 친구가 남은 삶은 집에서, 가족 품에서 보낼 수 있게 조금 더 관심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영연 동물자유연대 온센터 동물관리국장
정진욱 동그람이 에디터 8leonardo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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