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브리풍'이라는 주문(注文)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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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챗GPT를 쓰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보고서, 이메일, 자소서, 심지어 소설까지—챗GPT는 우리의 모든 문장을 대신 써준다.
말문이 막히고, 정리가 안 될 때 챗GPT는 글재주가 없는 사람도 단번에 좋은 문장을 쓸 수 있게 돕는다.
풍을 요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얼마나 느리고, 얼마나 내 것 같은 문장을 쓰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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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챗GPT를 쓰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보고서, 이메일, 자소서, 심지어 소설까지—챗GPT는 우리의 모든 문장을 대신 써준다. 말문이 막히고, 정리가 안 될 때 챗GPT는 글재주가 없는 사람도 단번에 좋은 문장을 쓸 수 있게 돕는다. 그럴듯한 말로 점철된 이 문장은 내 말투를 분명하게 학습하였지만, 곱씹어 읽다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어딘가 낯설고, 내 말인데 내 말이 아닌 것 같고, 겉모습은 정확한데 속은 비어 있는 느낌이 분명하게 든다. 속도가 주는 만족감 뒤엔 어김없이 공허한 잔상이 따라붙는다.
얼마 전, SNS에서 다음과 같은 챗GPT 활용법이 인기를 끌었다. "지브리풍으로 그려주세요." 요즘 가장 흔한 요청 중 하나다. 사진을 지브리풍으로 변화시킨 결과물을 본 사람들은 "진짜 지브리 같다"고 감탄하지만, 나는 유행의 이면이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다. 지브리풍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색감, 배경, 눈빛, 움직임—그 모든 것이 지브리처럼 보인다 해도, 그 안에 정말 지브리가 있을까? 지브리는 한 장면을 위해 열흘을 앓던 사람이 만든 세계다. 느린 리듬으로 무너졌다가, 겨우 다시 세워지는 세계. 창밖의 바람, 방 안의 정적, 무언가를 기다리는 아이의 뒷모습 같은 것들. 나는 그 세계를 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분명하게 풍경보다 마음에 가까웠다.
화풍의 풍(風)은 바람이다. 어딘가로부터 불어오는 것. 누군가의 시간과 고통, 취향과 사랑이 쌓여 만들어진 기류. 지브리풍이라는 말에는 그 바람을 만든 사람들의 철학과 손끝이 담겨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풍'은, 어느새 필터가 되어버렸다. 복제 가능한 분위기로부터 즉시 호출되는 감정. 우리는 그럴듯한 것을 원하고, 그럴듯하기만 해도 괜찮다고 여긴다.
이렇게 복제가 대세인 이 시기에 불행히도 나는 시를 쓴다. 문장 하나를 붙잡고 며칠을 앓기도 하고, 다 지우고 다시 쓰고, 또 멈춘다. 좋은 문장보다는 맞는 문장을 찾으려 애쓴다. '잘 썼다'는 말보다, '이 마음이 맞다'는 감각을 택한다. 그래서 나는 풍을 흉내 내기보다는, 창작자로서 내 안의 바람을 불어넣고 싶었다. 내가 쓴 문장이 나를 닮았으면 좋겠다, 조금 느리더라도, 조금 서툴더라도, 나를 통과했으면 좋겠다.
나 역시 간단한 업무에 챗GPT를 쓰며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누구든 '풍'을 요청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러다 보면 나조차도 나의 풍을 잃게 될까 봐, 문득 멈칫하게 된다. 기술의 속도는 늘 먼저 도착하지만, 먼저 닿는다고 해서 먼저 느껴지는 건 아니다. 표현이라는 건 결국,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드러내는 방식이니까. 그래서 요즘은 되묻게 된다. 풍을 요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얼마나 느리고, 얼마나 내 것 같은 문장을 쓰고 있는지. 그리고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의 문장은 누구의 풍을 닮았는지, 그 바람은 정말 당신에게서 불어오는 중인지.

이소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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