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의 끝내기로 최고의 공격수 막아냈다

조효성 기자(hscho@mk.co.kr) 2025. 4. 1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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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부처' 이창호 시니어 세계바둑 초대 챔피언
'라이벌' 유창혁 9단과 결승
304수 끝에 흑 2집 반 승리
바둑 영화 '승부' 인기 끌며
명승부 대결에도 관심 집중
"유창혁 9단 늘 어려운 선배
앞으로도 즐겁게 바둑둘 것"
제1회 블리츠자산운용 시니어 세계 바둑 오픈 결승전에서 승리한 이창호 9단이 트로피를 들고 있다. 한국기원

"바둑이 싫증 날 때도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바둑을 둘 수 있었던 것은 큰 복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즐겁게 바둑을 두고 싶다."

무뚝뚝한 표정에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돌부처' 이창호 9단은 자신의 세계 대회 24번째 우승이자, 통산 143승 고지를 밟은 뒤에도 여전히 변함없는 표정으로 소감을 말했다. 표정은 없지만 그의 말속에서 우승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16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린 제1회 블리츠자산운용 시니어 세계 바둑 오픈 결승전. 이창호는 시니어 세계 바둑 '초대 챔피언 트로피'를 놓고 유창혁 9단과 마주했다.

최근 화제가 된 영화 '승부'의 인기와 맞물려 더욱 주목받은 결승전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천재 바둑기사 조훈현과 이창호의 이야기를 그린 '승부'는 조훈현이 제자 이창호와의 대결에서 패한 뒤 다시 한번 정상에 도전하는 과정을 담았다. 하지만 많은 바둑 팬은 말수 없고 고요한 '돌부처' 이창호에 대해 다시 한번 알게 된 영화라고 입을 모은다.

오랜만에 찾아온 따스한 봄날 같은 온기가 바둑계에 펼쳐진 시니어 세계 대회 결승. 이날 '초대 챔피언'을 놓고 대결을 펼친 유창혁도 이창호와 같은 시대에 극과 극의 경기 스타일로 당대를 주름잡았던 라이벌이다. 또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와 함께 '한국 바둑 4대 천왕'으로 불린 전설이다. 그래서 더 반갑다.

'바둑의 신' 이창호가 최고의 끝내기 바둑을 뒀다면, 유창혁은 '세계 최고의 공격수' 스타일이다. 1990년대 이창호의 '전관왕'을 무너뜨린 주인공도 유창혁이다. 그래서 더 긴장되는 승부. 왕년의 라이벌답게 무려 304수까지 가는 접전이 펼쳐졌다. 공격수 유창혁을 상대로 특유의 끝내기를 앞세운 이창호의 승리. 이창호는 "유창혁 9단은 항상 어렵게 느껴지는 선배라 더욱 집중해서 두었다"고 자세를 낮췄다.

영화를 통해 알려졌듯 이창호의 모든 발걸음 하나하나가 한국 바둑 역사다. 이창호는 1986년 11세에 세계에서 둘째로 어린 나이로 입단한 뒤 1988년 바둑왕전 우승으로 세계 최연소 우승자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 이상 세계 1위로 군림했다. 어떤 선후배 기사들보다도 배 이상 긴 기간이다. 차분하고 고요한 모습만큼 그는 우직하게 정상의 자리를 지켜냈다.

현역 시절 이창호는 동료들에게도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인공지능(AI)을 상대로 인간계에서 유일한 1승을 거뒀던 '쎈돌' 이세돌도 "사실상, 바둑의 신이었다"고 말할 정도다. 이창호는 2005년 '바둑 삼국지' 농심신라면배에서 중국과 일본 기사 5명을 연달아 꺾고 한국에 우승컵을 가져오기도 했다. 바로 상하이 대첩이다. 당시 중국의 창하오 9단은 "다른 한국 기사를 모두 꺾어도 이창호가 남아 있다면, 그때부터 승부는 시작이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서 조훈현은 "처음엔 (이창호의) 천재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모습이 남달랐다. 나도 그렇게 버티기는 힘들었다"고 떠올렸다. 또 "이창호는 내 분신 같은 존재다.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더 일찍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털어놨다.

처음 바둑을 시작했을 때부터 묵직하게 자리를 지켰던 이창호는 여전히 한국 바둑계에서 실력으로 후배들과 겨루고 있다. 그리고 말수는 적지만 언제나 "팬들에게 최상의 기보를 보이겠다"고 약속한다.

이창호의 뒤를 이어 이세돌이 나왔고, 지금은 세계 최고 기사인 신진서가 계보를 잇고 있다. 어쩌면 조훈현에게 이창호가 있었듯, 이창호도 무섭게 기세를 올리는 후배들을 보며 자극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창호는 이날 우승으로 '최상의 기보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바둑이 즐겁다고 말한다. 현실에서 이창호의 묵묵한 승부는 계속된다.

[조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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