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비정규직 4명 중 3명 "1년 간 최소 1번 직장 내 괴롭힘 겪어"
엔딩크레딧·직장갑질119 '고 오요안나 기상캐스터' 사건 관련 긴급 설문
원인 '무늬만 프리랜서 고용형태' 최다…MBC 진상규명 '기대 안 해' 75%
[미디어오늘 김예리 기자]

“단 한 번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XX놈아, 야 이, XX아'가 디폴트인 선배가 있습니다. '내가 이○○(유명 PD)에게 배웠는데 넌 그때 들어왔으면 죽었다'는 말도 했습니다.” “PD가 정규직에겐 안 그러면서 프리랜서에게만 프리랜서란 이유로 밤에도 주말에도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압박합니다.” “상사가 후배를 조그마한 방으로 데려가 소리치며 물건을 던졌습니다.”
방송 비정규직·프리랜서 노동자들이 겪었다고 직접 증언한 직장 내 괴롭힘 사례의 일부다. 고 오요안나 MBC 보도국 기상캐스터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방송 비정규직이 놓인 노동인권 사각지대가 드러난 가운데,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 4명 중 3명은 한 해 동안 적어도 한 번의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방송 비정규직 노동 단체 엔딩크레딧과 직장갑질119는 지난 3월 5~14일 '방송 비정규직 긴급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를 16일 밝혔다. 기상캐스터를 비롯해 연출·작가·촬영·기술·미술·후반작업·아나운서·기자·리포터·배우 등 직군에서 일하는 비정규직·프리랜서 노동자 396명이 조사에 참여했다.
응답한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 4명 중 3명이 지난 1년 간 한 번이라도 직장 내 괴롭힘을 겪었다고 밝혔다. 75%가 △폭언·폭행 △모욕·명예훼손 △따돌림·차별 △업무 외 강요 △부당 지시 등 5개 범주 중 최소 한 가지를 겪었다고 밝힌 것이다.
괴롭힘 수준을 묻자 '매우 심각하다'가 14%, '심각한 편'이 45%였다. 단체들은 “(응답자들이 겪은)괴롭힘이 피해 당사자에게 쉽게 넘기기 어려운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며 “방송 현장의 괴롭힘 문제가 특정 직군만의 문제가 아니며, 방송산업 곳곳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짐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괴롭힘 가해자를 물었을 때 '임원이 아닌 상급자'가 67%(복수응답)로 가장 높았다. 이어서 '비슷한 직급 동료'로부터 당했다는 응답이 27%, '사용자'와 '원청 관리자나 직원'이 각각 16%였다. 피해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다수가 직장 내 괴롭힘을 참거나(68%), 회사를 그만뒀다(53%)고 답했다. 항의했다는 응답은 12%에 그쳤고 사측이나 노동조합, 관계기관에 신고했다는 응답은 3%에도 미치지 못했다. 응답자들은 신고하지 않은 이유를 밝힌 주관식 답변에서 '바닥이 좁아서 소문이 금방 퍼진다','다른 사람들이 다 참는다'는 취지의 내용이 주를 이뤘다.
응답자의 절대 다수인 94%가 고 오요안나 기상캐스터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이 사건에 갖는 관심도를 보여주는 응답 비율이다. 이 사건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가정했을 때 'MBC 사내에서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한 구조적 요인'을 묻자 가장 많은 48%의 응답자가 '무늬만 프리랜서라는 고용형태'를 꼽았다. 다음으로 35%가 '기상캐스터 사이의 위계적 조직문화'를 10%가 'MBC라는 원청의 무책임한 태도'를 원인으로 봤다.
MBC가 고 오 캐스터의 '직장 내 괴롭힘' 여부 등을 자체 조사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상당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진상이 규정될지를 두고 회의적이라고 답했다. 73%가 'MBC의 오요안나 사건 진상규명 기대 여부'에 대해 '아니다'라고 답했으며 '그렇다'는 답변은 19%에 그쳤다. 단체들은 “언론을 통해서 알려진 이후에도 'MBC 흔들기' 등 해당 사건을 MBC 자사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언급하는 등 진심어린 사과나 문제 해결의 자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아니다' 응답자에게 주관식으로 왜인지를 묻자 △MBC는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를 오랫동안 방관했던 방송사 △사망 사고이기 때문에 일을 축소하거나 덮으려고 하지 않을까 △실제 MBC에서 일한 경험으로 미뤄 MBC는 프리랜서들 간 문제라 치부하며, 유야무야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등 답변이 나왔다. 진상조사위에 비정규직 구성원이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제2의 오요안나 사건'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법적 보호와 처우 개선을 꼽았다.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조항을 프리랜서에게 확대 적용'는 답변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대한 처우 개선 및 관리감독 강화' 답변이 각각 43%였다(복수 응답). '방송업계 위계적 조직문화 개선'과 '상시·지속 업무 수행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이 31%, '인권침해와 괴롭힘 신고 시스템 개선과 현실화'가 19%로 뒤를 이었다.
엔딩크레딧과 직장갑질119는 “오요안나 캐스터 사망 사건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5인 미만, 특수고용, 프리랜서 노동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한계를 알려내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현재 국회에는 직장내 괴롭힘 금지 관련 근로기준법 개정안 10여개가 발의돼 있다”며 관련 법 개정을 촉구했다. 이어 “그뿐 아니라 방송현장의 불법적인 프리랜서 고용구조를 바꿔내야 한다”고도 했다.
이들은 “18일 오전 10시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에서 오요안나 사건과 관련한 질의가 있을 예정”이라며 “MBC의 진상조사위원회 결과가 아직 발표되지 않았고,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 조사 기한도 연장된 상황에서 과방위 전체회의가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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