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영화 속 악(惡)의 얼굴 '불쾌한 이웃'

아이즈 ize 한수진 기자 2025. 4. 17.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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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한수진 기자

(왼쪽부터) 류준열, 김의성, 유해진 / 사진=넷플릭스,  (주)쇼박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손에 닿지 않는 조커가 아닌, 손에 닿는 불쾌한 이웃이 스크린을 집어삼키고 있다.

최근 한국 영화의 악역은 과장된 '절대 악'보다 현실감이 짙게 배어든 악인이 많다. 이들은 사이코패스나 괴물이라는 설정 없이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눈에 띄는 폭력이 아닌 일상적인 방식으로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고, 광분하며 미쳐있기보다는 상식과 예의가 부재하고, 잔인하다기보다는 무신경하다. 격노보다 불쾌감으로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다. 요즘 작품 중에선 '계시록'의 류준열, '로비'의 김의성, '야당'의 유해진의 극 중 모습이 이런 흐름의 최전선에 있다.

/ 사진=넷플릭스

'계시록'의 성민찬, 믿음이 광기로 변모하는 자연스러운 찰나

'계시록'에서 류준열이 연기한 성민찬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는 목사다. 극 초반부 민찬의 모습은 기독교 신자라면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현실적이다. 개척 교회 목사의 '찐 고충'과 후반부 광신으로 변모한 '찐 광기'를 모두 보여주는 캐릭터다. 그가 신념이라 부르는 믿음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채 오직 계시를 향해 돌진하는 폭력으로 변질된다. 

류준열은 이 믿음의 불안정성을 섬세하게 끌고 간다. 계시에 사로잡힌 목사가 아니라, 계시에 매달리지 않으면 무너질지도 모르는 남자의 얼굴로 민찬을 완성했다. 목소리 톤의 변화, 제스처의 미묘한 동요, 감정의 억눌림 속에서 폭발하는 장면은 광신보다는 불안의 에너지에 가깝다. 류준열은 "믿음은 결국 각자가 품은 진실"이라며 신앙을 넘어선 보편적 감정으로 민찬의 광기를 설계했다.

/ 사진=(주)쇼박스

'로비'의 최실장, 내 옆자리 '개저씨'

영화 '로비'에서 김의성이 연기한 최실장은 내 옆자리에 앉을까 무서운 오늘날 '개저씨'의 표상이다. 최실장은 공적인 신념과 더러운 욕망의 경계를 오가며, 일 앞에선 근엄하게 욕망 앞에서 무책임하게 움직이는 인물이다. 하지만 김의성은 이 인물을 '추하게' 연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멋져 보이려 애썼다"고 말한다.

그렇게 완성된 최실장은 더 끔찍하다. 그는 자신의 왜곡된 욕망을 매력이라 착각하며,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고 괴롭히면서도 자신이 호감을 주고 있다고 믿는다. 골프 라운딩 장면에서 드러나는 집요한 언행, 여성 선수 진프로에게 던지는 불쾌한 시선과 말들은 단순한 '개저씨' 캐릭터를 넘어서 '의도하지 않는 불쾌함'이라는 층위를 만든다. 이 인물은 영화 속 허상이 아니라, 사회 어딘가에 실재할 법한 존재로 다가온다.

/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야당'의 구관희, TV에서 봤던 그때 그 (부패)검사

유해진이 '야당'에서 연기한 구관희는 권력을 위해 직업적 신념을 저버린 검사다. 그는 조직의 상층부를 향한 욕망을 은은하게 드러내며 매 장면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조밀하게 새긴다. 그 참을 수 없는 신념의 결여가 마치 우리네 뉴스 속 인물을 보는 느낌을 준다. 이 영화를 연출한 황병국 감독 역시 "구관희는 매스컴에서 나온 몇몇 (비리) 검사를 엮어 만든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해진은 실제 어머니에게 들었던 '성공하라'는 말을 대사에 녹이며, 구관희의 욕망을 현실적 토대 위에 얹었다. 그 욕망은 드라마틱한 폭발보다는, 눈치와 계산, 서늘한 판단으로 채워진다. 그는 부패를 조용히 설계하고 이끄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무섭고, 더 익숙하다.

이들의 연기는 공통적으로 일상과 실재를 무기로 한다. 눈을 부릅뜨지 않고도, 소리를 지르지 않고도 위협을 전달하는 연기다. 과거처럼 사이코패스 설정이나 '괴물 같은 인간'이라는 설명 없이도, 관객은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충분히 느낀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가 느끼는 불안과도 맞닿아 있다. 명확한 악보다 모호한 악, 폭력보다 일상 속 조용한 잔혹함이 더 현실적 공포로 다가오는 시대다. 이제 스크린 속 악인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평범한 옷을 입고, 친절하게 말을 건네며, 논리적으로 사람을 무너뜨린다. 최근 한국 영화가 그리는 악은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다. 그래서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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