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대전환, 지금 시작해야 할 국가의 숙제

2025. 4. 1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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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이 이끄는 산업 전환…데이터 주권, AI 패권의 선순환
구태언 부의장(코리아스타트업포럼, 변호사)
지금 우리 실력을 직면할 시간
“그게 신산업도 구조조정도 없는 우리 경제의 실력이다.”

올해 2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1.8%라는 성장률 전망을 두고 이 한마디로 우리 경제의 현실을 평가했다. 무심하게 들릴 수 있는 이 말은, 사실 지금의 대한민국 경제가 마주한 본질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지난 10년간 산업 구조를 어떻게 바꿔왔는가? ‘혁신 성장’과 ‘디지털 전환’은 구호로만 남지 않았는가? 실현을 위한 제도는 과연 있었는가?

현장의 목소리는 다르다. 시대에 맞는 혁신적 스타트업들은 정부 부처 간 조율 부재와 ‘낡은 법으로 신산업을 막는’ 규제 해석에 발목이 잡혔다.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익숙한 핑계 아래, 수많은 실험은 시작조차 못한 채 사라졌다. 핀테크, 디지털 헬스케어, P2P 모빌리티, AI 금융서비스, 리걸테크… 시민들의 실질적 수요를 등에 업은 스타트업들은 결국 기득권의 텃세와 규제당국의 외면에 무너졌다.

그렇게 10년이 흘렀고, 지금 우리는 참담한 경제성장률과 관세장벽에 흔들리는 산업 구조 속에서 버티고 있다. 1%대 성장률은 변화를 두려워한 우리 사회의 실력이자, 정부가 미뤄온 숙제가 한꺼번에 청구서로 돌아온 결과다.

혁신산업을 일으키려는 의병들,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다
PC 인터넷 시대를 지나 모바일 시대가 도래했을 때, 수많은 창업자들은 손안의 인터넷을 활용해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사용자는 기꺼이 그 기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감염병 시기, 수천만 건의 비대면 진료가 이뤄졌고 그 효용은 국민 모두가 체감했다. 그러나 엔데믹이 찾아오자 보건복지부는 이를 ‘한시적 예외’로 되돌렸고, 국민 보건에 기여한 수많은 비대면진료 플랫폼은 하루아침에 불법이 되었다.

수도권의 교통 공백을 메운 모빌리티 스타트업들은 ‘운수법 위반’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확장을 멈췄다. 서울 등 대도시의 주차난을 획기적으로 해결할 P2P 차량공유는 지금도 하남시에만 머물고 있다. 숙박 공유는 기존 업계와의 갈등 속에 정지했고, 해외 거대 플랫폼이 한국 시장을 장악해버렸다.

암호토큰 기반의 지급결제나 소액 외환 송금은 글로벌 확장성과 혁신성이 충분하지만, 금융위원회는 이를 끝내 허용하지 않았다. 반면 해외에서는 비자가 암호토큰 기반 결제카드를 선보이며 국경을 넘는 지급결제의 시대를 열고 있다. 이 기술은 K-컬처 수출의 든든한 디딤돌이 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또 한 번 기회를 놓쳤다.

신산업은 있었다. 그러나 관료주의와 기득권 보호 논리에 갇혀, 이 시대의 ‘디지털 의병’들은 하나씩 정부군에 의해 진압당했다.

실증하지 못하면 데이터는 없다. 데이터 없이는 AI도 없다
AI는 오늘날 기술 주권을 결정짓는 핵심 자산이다. 그러나 한국의 AI 산업은 유독 정체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왜일까?

AI는 학습을 통해 진화한다. 그리고 그 학습에는 방대한 양의 고품질 데이터가 필요하다. 하지만 산업이 실증되지 않으면 사용자 기반이 없고, 사용자 없이 쌓이는 데이터도 없다.

예를 들어, 토스는 단순 송금 서비스를 넘어 종합금융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사용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기 탐지, 맞춤 금융 제안, 신용평가 기능이 AI와 함께 고도화됐다.

반면 같은 시기, 수많은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들은 실증을 허락받지 못했고, 고도화된 의료 AI는커녕 기초 학습용 데이터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문을 닫거나 해외로 나가야 했다.

데이터는 디지털 산업의 부산물이다. 산업이 움직여야 데이터가 흐르고, 데이터가 있어야 AI가 학습한다. 아무리 GPU가 많고 슈퍼컴퓨터가 있어도, 학습시킬 콘텐츠가 없다면 그것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스타트업은 디지털 대전환의 바로미터다
우리는 종종 스타트업을 유니콘이나 IPO 대상으로만 본다. 그러나 스타트업은 기술을 통해 사회문제를 발견하고 실험하는, 작지만 선명한 국가 전략 단위다.

지방의 의료 공백, 돌봄 사각지대, 기후위기, 청년 주거 문제까지-정부가 해결하지 못한 과제를 스타트업은 먼저 발견하고 뛰어들었다.

이들은 작지 않다. 오히려 빠르게 반응하고, 부처의 칸막이를 넘어서고, 현행법의 한계를 넘어선다. 음식 배달 플랫폼이 지역 음식점의 위생을 대신 감시했고, 법률 정보 플랫폼이 시민의 권리 보호를 구체화했다.

이들이 만든 플랫폼은 데이터가 쌓이는 공간이자, 기술과 사용자를 연결하는 핵심 인프라다. 그리고 지금, AI 플랫폼이 기존 플랫폼을 흡수하고 재편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생성형 AI는 단순히 콘텐츠를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인간의 의사결정 구조를 바꾸고, 산업의 흐름을 재설계하는 지배적 인터페이스다.

지역 소멸도, 지역 기반 신산업을 스타트업에게 허용한다면 충분히 극복 가능하다. 오히려 기회는 지역에 있다.

우리는 왜 생성형 영상 AI를 갖지 못했을까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상 콘텐츠를 만들고 소비하는 나라 중 하나다. 드라마, 웹툰, 예능, 스포츠, 교육, 뉴스까지-매일 수십만 개의 영상이 생성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에는 글로벌 수준의 생성형 영상 AI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AI에게 합법적으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개인정보보호법이다. 영상에는 인물이 등장하고, 이 인물이 식별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학습 활용이 원천 차단된다. 실제로는 AI 가 현실사회에서 사람을 식별하는 능력을 가져야 오히려 더 정교하게 사람을 보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은 식별능력을 키울 기회를 주지 않는다. 반면, 테슬라는 전 세계 700만 대 차량에서 매일 학습용 영상을 수집해 자율주행을 고도화해 사람을 보호하는 안전한 자율주행차를 만들어 냈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미래차 시장에서조차 뒤처질 위기에 처해 있다.

두 번째는 저작권법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현행 저작권법상 AI 학습을 위한 저작물 활용이 원칙적으로 금지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학계와 산업계에서 “공정 이용”을 통해 이를 허용하자고 주장하지만, 정작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반면 미국의 스타트업들은 세계의 저작물을 학습해 연일 생성형 AI 모델을 쏟아내고 있다. 법개정에 성공한 일본의 AI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영상 AI는 출발조차 할 수 없다. 데이터도, 학습도, 시도도 모두 차단된 현실 속에서, 스타트업은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결국 남는 길은 글로벌 AI 플랫폼에 종속되거나 흡수되는 길뿐이다. 우리는 정보를 보호하려다, 기술주권을 스스로 내려놓고 있다. 정보보호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디지털 금 모으기 운동을 시작하자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펼쳐 위기를 함께 이겨냈다. 이제는 디지털 금을 함께 모을 시간이다. 우리가 가진 수많은 콘텐츠-텍스트, 이미지, 영상, 음악, 기사, 회의록, 창작물, 지식-이 모두는 AI에게 연료가 되고, 기술을 진화시키는 자산이 된다. 이 자산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함께 학습시키며, 그 결과의 수익을 정당하게 분배하는 구조. 그것이 바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사회계약이 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도 어렵지 않다.

첫째, 정부가 ‘디지털 금 모으기 캠페인’을 주도해야 한다. 과기정통부가 중심이 되어, 포털·미디어·학계·창작자 단체와 협력하고, 국민이 참여하는 개방형 데이터 기부 시스템을 구축하자.

둘째, “내 콘텐츠로 AI 키우기” 운동을 통해 국민이 자발적으로 데이터 제공자가 되고, 스타트업은 설계자와 실험자가 되며, 정부는 책임 있는 조정자로 역할을 수행하자.

셋째, 3년간 AI 학습 목적의 저작물 자유 활용을 허용하되, 돈을 벌 경우 창작자에게 수익을 정산하는 시스템을 설계하자.

이렇게만 해도 우리는 AI 기술력, 산업 역량, 데이터 주권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지금 한국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전략이다.

AI 컴퓨팅센터, 데이터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과기정통부가 추진 중인 ‘국가 AI 컴퓨팅센터’는 GPU 연산 인프라를 갖춘 전략 사업이다. 그러나 아무리 연산 능력을 확보해도, 학습시킬 유용한 콘텐츠와 데이터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이 인프라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AI는 연산이 아니라 학습을 통해 진화한다. 진짜 AI는 맥락을 이해하고, 실제 사용자의 피드백을 반영해 성능을 개선하는 기술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산업이 움직이고, 데이터가 축적되며, 콘텐츠와 경험이 AI의 뇌 속으로 유입되어야 한다.

GPU와 함께 반드시 필요한 것은 데이터 개방, 콘텐츠 활용, 그리고 사회적 신뢰다. 지금이야말로 정부가 ‘디지털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AI 인프라에 생명력을 부여해야 할 때다. 그것이 국가 AI 전략을 실효성 있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스타트업은 타는 목마름으로 준비되어 있다. 이제 정부의 차례다
역사는 언제나 변화를 놓친 사회에 냉정했다. 우리는 이미 모빌리티, 공유경제, 디지털 금융 등에서 글로벌 흐름에 늦었다. 지금은 생성형 AI, 영상 기반 AI, 융합 서비스 AI 등에서 또 한 번 뒤처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는 뜨거운 열망을 품은 열린 사회다. 데이터를 생산할 국민이 있고, 기술을 개발할 스타트업이 있으며, 글로벌과 경쟁할 플랫폼 역량도 존재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정부의 결단뿐이다.

닫힌 규제의 문을 파괴적으로 열고, 사회적 공론장을 만들고, 산업이 실험할 수 있게 허용한다면 우리는 언제든 따라잡을 수 있다. 산업 전환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디지털 대전환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숙제다.

[구태언 부의장(코리아스타트업포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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