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내려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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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년 전 백악기 시절, 한반도를 호령했던 동물은 공룡이었다.
그들이 물러간 뒤, 사람이 부족국가를 건설하고 역사를 써내려간 이래 한반도 동물의 왕은 호랑이였다.
최남선은 1908년 '소년' 창간호에 한반도 호랑이 형상을 싣고, 1926년 동아일보에 7편의 호랑이 글을 연재했다.
이 정도면 호랑이는 국가적 동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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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의 풍경동물]
1억 년 전 백악기 시절, 한반도를 호령했던 동물은 공룡이었다.
그들이 물러간 뒤, 사람이 부족국가를 건설하고 역사를 써내려간 이래 한반도 동물의 왕은 호랑이였다. 실로 대단한 놈이다. 놈이 포효하는 걸 앞에서 들으면 ‘아, 이거구나!’ 싶은 감탄과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늘과 땅이 울리는 느낌이랄까. 녀석과 나 사이에 방탄유리나 철창이 없다면,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달아나기는커녕 얼어붙고 말 것이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지만, 그럴 정신이 과연 붙어 있을까.
오랜 시간 호랑이는 공포였고, 영웅이었으며, 신령스러운 존재였다. 옛이야기와 속담, 격언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범에게 물려갈 줄 알면 누가 산에 갈까, 승냥이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 호랑이 없는 골에 여우가 왕 노릇 한다, 오뉴월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이빨 빠진 호랑이, 종이호랑이, 호랑이 선생님, 호랑이 장가가는 날 등 관용적 표현도 수두룩하다. 옛사람들은 죽음의 전염병 콜레라를 ‘호열자’라 불렀다. 이는 콜레라의 음차 표현인 동시에 ‘호랑이가 살점을 찢는 듯한’ 병의 고통을 함께 담은 것이다.
비록 단군신화에는 참을성 없이 사람 되기를 포기한 어리석은 존재로 등장하나, 끝내 사람이 된 곰보다 더 자주 국가적 상징물로 재현됐다. 왕이 머무는 궁궐 앞엔 돌호랑이를 세웠다. 1965년 베트남전쟁에 뛰어든 ‘맹호부대’는 미국의 혈맹 대한민국의 다른 이름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호돌이도,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의 수호랑도 호랑이였다. 일제강점기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한반도 토끼 형상론’을 들고나오자 최남선이 내놓은 건 ‘호랑이 형상론’이었다. 최남선은 1908년 ‘소년’ 창간호에 한반도 호랑이 형상을 싣고, 1926년 동아일보에 7편의 호랑이 글을 연재했다. 하지만 그는 곧 토끼(친일파)가 되고 만다.
이 정도면 호랑이는 국가적 동물이 아닌가. 우리가 이처럼 용맹하단 말인가. 조선시대 ‘열녀비’가 가부장제의 왜곡된 강박을 반영하듯, 호랑이를 국가 상징물로 지나치게 내세운 내력에는 외침에 시달려온 작고 힘없는 나라의 강박이 스며 있다.
손바닥에 ‘왕’을 써놓고 사람의 왕이 되려 한 이 시대 한국인이 있었다. 누구 말마따나 우리가 개돼지라면, 그는 호랑이가 되려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격노’를 호랑이의 ‘포효’라 여겼을지 모른다. 커다란 덩치로 책상을 내리치면 고위공직자들도 오금을 저릴 지경이었다. 검사 시절 그에게서 조사받았던 한 피의자는 회고록을 통해, 그런 순간 소변을 지리고 말았다고 고백했다.
인정사정없던 호랑이가 끌려 내려왔다. 긴 겨울 광장에서 이어진 탄핵 집회 중 인상적인 공연 하나를 꼽으라면 이날치밴드의 ‘범 내려온다’를 뺄 수 없을 것이다. 가혹한 세금은 호랑이보다 무섭다 했던가, 무능한 대통령의 왕 놀음이야말로 호랑이보다 무섭지 않았나.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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