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관식의 성격처럼 우직하게 시청자들에게 사랑받는 '폭싹 속았수다'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MBC <전원일기>는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대한민국에서 방영한 장수 드라마다. <전원일기>는 시골마을 양촌리 김회장 일가를 중심으로 대가족 집안의 가족애와 시골마을 공동체 속 선한 사람들의 울고 웃긴 에피소드를 소재로 오랜 세월 사랑받았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뜨악할 만한 대사나 에피소드도 있지만, 배우 최불암과 김혜자가 회장 내외로 출연한 김회장 댁을 중심으로 인간미 가득한 한국 전통 공동체의 이상향을 그려냈다.
한편 3월 말 마지막 회차까지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국내는 물론 전세계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폭싹 속았수다>는 1950년대부터 2000년대 이후까지 제주의 시골마을, 푸른 바다와 유채밭을 주요 배경으로 오애순(아이유, 문소리)과 양관식(박보검, 박해준) 부부의 사랑과 가족애를 그린다. 트렌디하고 장르적인 요소로 콘텐츠를 조립하는 OTT 시대에 <폭싹 속았수다>는 주인공 양관식의 성격처럼 우직하게 이들의 삶과 사랑을 그려내는 방식을 택한다. 드라마는 초반 공개 이후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점점 더 많은 시청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추세다.

어떤 면에서 <폭싹 속았수다>는 핵가족과 1인 가족 시대를 위한 <전원일기>처럼 느껴지는 면도 있다. <전원일기>가 대가족 시대의 이상향을 보여줬다면, <폭싹 속았수다>는 더 이상 대가족이 존재하기 힘든 이 시기에 작은 가족의 사랑과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말해준다. 인물들이 툭툭 내뱉는 대사와 상황들로 때론 웃기고, 때론 울리고, 때론 다독이면서 말이다.
오애순과 마을 잠녀들의 에피소드는 시골 마을의 따스한 정을 느끼게 해주며, 각각 선하고 이상적인 주인공 부부의 존재 역시 그러하다. 다만 가족의 규모는 거대하지 않아도 긴 세월 속에서 풍파를 헤치는 양관식 부부의 삶을 다루는 크기는 OTT 시대에 어울리게 거대하다. 간첩소동, 김일성 사망, 불법과외, IMF, 2002년 한일월드컵 등 오애순과 딸 양금명(아이유), 제주 시골마을과 대도시 서울을 오가며 시대의 요소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당연히 <폭싹 속았수다>가 이상적인 인간군상을 그리는 방식 또한 <전원일기>와는 다르다. 일단 <전원일기>의 김회장 내외처럼 가부장제도 속 이상적인 부부가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다. <전원일기>에는 종종 마을에 나타났다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불행한 사연 품은 여인들이 잠깐씩 등장한다. 오히려 <폭싹 속았수다> 이야기의 시작점인 전광례(엄혜란)는 <전원일기> 속 불행한 사연을 품은 여인과 닮았다. 남편은 죽고 맏딸은 멀리에서 보며 키워야 하는 밑바닥의 억센 여인 잠녀 전광례는 불행하긴 하지만 강한 삶의 의지를 지닌 주인공이다. 전광례의 죽음 이후, 그녀의 딸 오애순이 다시 딸 양금명(아이유)을 키워내며 <폭싹 속았수다>의 서사는 흘러간다. 또한 이 여성 3대의 서사는 가난한 밑바닥에서 성공을 일궈온 대한민국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와도 맞물린다.
기존에도 이런 시대의 서사를 다룬 국내 드라마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드라마에는 양관식이 없었다. 많은 아비들은 술에 취해 갈지자로 걷거나 아니면 밖에서는 호인 안에서는 폭군이었다. 그 상황에서 어미들은 생활 전선에 나가거나 아니면 집에서 울음을 삼키며 지낸 식이었다(물론 <폭싹 속았수다>도 이런 시대상을 선주 부상길(최대훈)과 그의 아내 박영란(장혜진)을 통해 보여주기는 한다). 심지어 <전원일기>의 호인 김회장조차 그저 파, 하고 웃을 뿐 아내의 마음을 달래거나 아내에게 사랑을 전하는 행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폭싹 속았수다>는 양관식과 오애순을 내세워 같은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다루는 데 성공했다. 평생을 한 소녀만 바라보고 살아온 소년과 그 소년의 사랑으로 고단한 인생을 헤쳐나간 소녀가 있다. 두 사람은 서로 성실하고 솔직하게 사랑했기에, 거친 세월 속에서도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폭싹 속았수다>는 어찌 보면 한국인에게 더럽게 힘겨웠던 세월을 다루면서도, 주인공 부부의 순수함을 결코 포기 하지 않는다. 그것이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위로라는 듯이 말이다.
한편 오애순의 딸인 양금명의 시선은 <폭싹 속았수다>를 바라보는 시청자의 시선과 맞물린다. 양금명은 가난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하지만 그녀가 어린 시절 살아온 시대와 그녀가 살아가는 시대는 또 다르다. 1990년대 대학생인 양금명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 사랑하고 살아가길 바란다. 하지만 그녀가 밟아가는 인생의 굴레는 그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양금명의 이런 갈등과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며, 동시에 <폭싹 속았수다>를 바라보는 시청자의 시선과도 겹친다.

다만 금명은 성인이 되어도 과거의 순수한 사람들인 사랑스러운 부모에게 의지하고 위로 받는다. 마찬가지로 시청자도 <폭싹 속았수다>의 울고 웃기는 대사와 아름다운 가족의 사랑을 통해 위로받는 것이 사실이다. 다행히 OTT 시대의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화면 속 푸른 유채밭의 오애순과 양관식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시청자인 우리는 그들의 삶을 통해 나, 혹은 나의 가족, 혹은 소중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폭싹 속았수다' 한마디의 말을 마음으로 나지막하게 건네게 된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넷플릭스]
Copyright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언젠가는 분명 빛나게 될 반가운 신인 배우들의 향연(‘언슬전’) - 엔터미디어
- 자막 없는 KBS 주말극, 성가신 걸까? 돈이 없는 걸까? - 엔터미디어
- 주근깨조차 매력적인 김민하를 보면 웃다가도 울게 된다(‘내가 죽기 일주일 전’) - 엔터미디어
- ‘승부’, 불미스러운 일 겪은 유아인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게 될까 - 엔터미디어
- 더럽고 질기게 얽혔다... 이 피카레스크를 빠져서 보게 되는 이유('악연')
- 박은빈·설경구의 소름 돋는 연기도 어쩌지 못한 빈약한 서사(‘하이퍼나이프’) - 엔터미디어
- 신동엽부터 김원훈까지, 현시점 가장 뜨거운 재능들의 별난 실험 ‘직장인들’ - 엔터미디어
- 넌 있어? 이런 아빠 있어? 아이유의 짜증 빙자한 자랑에 공감 백배(‘폭싹속았수다’) - 엔터미디
- 류준열의 섬뜩한 광기, 어째서 낯설지 않은 걸까(‘계시록’) - 엔터미디어
- 대배우 나문희의 현재진행 중인 찬란한 계보, 그리고 후계자 염혜란 - 엔터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