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불렀다, “원고 응우옌티탄, 피고 대한민국”

한겨레21 2025. 4. 16.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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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을 듣는 법정]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국가배상 2심 승소… “국가 폭력 과거 인정하고 ‘공권력 통제 방법’ 성찰해야”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의 생존자인 응우옌티탄씨가 2025년 1월17일 오후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소송 2심 승소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1별관 312호, 2025년 1월17일 오후 2시. ‘응우옌티탄 대 대한민국’ 항소심 판결 선고가 이루어진 법정과 시간이다. ‘학살을 듣는 법정’ 연재는 이 선고일에서 시작한다.

결코 져서는 안 되는 소송

법정 문이 열리기 전인 오후 1시30분쯤 법정 앞에 도착했다. “변호사님, 결과가 어떻게 될 거 같아요?” 일찍 와 있던 단체 활동가들, 소송에 연대해온 시민들이 인사 대신 상기된 표정으로 물어왔다.

근 일주일 동안 패소에 대한 불안감이 가득했다. 변호사에게 져도 되는 소송은 없지만, 이 소송은 결코 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라고 명명되는 역사적 비극(사실)에 대한 최소 추정치에 따르면 베트남 중부에 있는 90여 개 마을에서 집단학살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1만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중 ‘퐁니’라는 하나의 마을, ‘응우옌티탄’이라는 한 명의 피해자가 사건 이후 50여 년 만에 소송을 제기했다. 단 한 명의 소송이었기에 재판 과정에서 늘 듣는 질문이 있다. ‘왜 이 사건이고, 왜 이 사람입니까?’ 답은 이랬다. ‘퐁니 마을에 대한, 응우옌티탄에 대한 학살의 증거가 지난 20년 기적같이 모였습니다. 이 증거로 진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국가범죄의 보편적 특징은 ‘증거 없음’이다. 가장 거대한 권력이 자행한 범죄이기에 증거는 조작되고 사라진다. 범죄자의 권력이 계속되기에 피해자의 목소리(항의)도 오랜 시간 억눌릴 수밖에 없다. 이 불리함과 부정의가 겹겹이 쌓인 구조를 뚫고, 퐁니 마을 그리고 응우옌티탄에 관한 증거가 2000년부터 모였다.

2000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수십 년간 묻혀 있던 퐁니 사건에 대한 주월 미군의 감찰보고서가 발굴된다. 퐁니 마을 인근에 주둔하던 미군은 모든 것을 봤고, 모든 것을 기록했다. 미군이 학살 직후 마을에 진입해 찍은 사진 하단의 설명이다. “임신부 등 사살당한 여성들과 익사한 것으로 보이는 아이의 시신.” 가해자는 증거를 조작하는 데 철저하지 못했다. ‘파월한국군전사’ 등에 학살 사실 자체가 담기진 않았지만, 해병 제2연대 제1대대 제1중대가 1968년 2월12일 퐁니 사건 당시 해당 지역에서 작전한 사실까진 지우지 못했다. 언론은 제1중대 소속 참전군인을 취재했고, 이들은 대부분 불법행위를 인정했다. 침묵하는 이는 있었지만 부인하는 이는 없었다.

무엇보다 미군 기록을 들고 퐁니 마을로 간 한겨레21 기자에게 주민들은 ‘이 사진 속 주검이 내 가족이다’라고 울부짖으며 당시를 증언했다. 그리고 한 여성이 기자에게 다가와 옷을 들추어 복부에 길게 그어진 총상을 보여줬다. ‘사진을 찍어달라. 이게 내 고통이다.’ 응우옌티탄이었다.

“51% 이길 거 같습니다.” 49%는 질 수도 있다는, 하나 마나 한 답변이었지만 진심이었다. 법률가라면 퐁니 사건의 구체적 증거들을 외면할 수 없다. 2023년 2월 1심에서 승소 판결도 내려졌다. 모든 쟁점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준 1심 판결이었다. 50%가 아닌 51%의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안했던 이유는 법적 쟁점, 특히 소멸시효 완성 여부(오래된 과거의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현재 이행하라고 할 수 있는지)에 관해 항소심 재판부가 1심과 달리 부정적으로 판단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이 문제를 여전히 외면하는 우리 사회의 냉대가 ‘정의로운 판결’의 가능성을 의심하게 했다.

국가범죄 불리함을 뚫고 증거가 모여들다

나를 포함한 원고 쪽 변호사, 소송을 지원하는 활동가와 지지자, 피고 대한민국 소송수행자와 변호사, 피고 쪽 관련자, 기자들. 100여 명이 앉고 서서 법정을 가득 채웠다. 오직 한 줄을 듣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건들의 선고가 이어지다 ‘원고 응우옌티탄, 피고 대한민국’ 소리가 들렸다.

“주문, 피고의 항소를 기각한다.”

1심 선고 직후에는 법정 앞 복도에서 많은 이가 울먹였다. 항소심 때는 눈웃음으로 대신했다. 표정으로 서로 끄덕이며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를 나눴다. 한베평화재단의 권현우 사무처장이 베트남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원고에게 전화했다. “이겼어요, 우리가 이겼어요.”

1999년부터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공론화와 정부의 사과와 책임을 요구하는 운동이 한국 사회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가해국의 인정도 사과도 책임도 없었다. 공론화 20년 만인 2020년, 침묵과 외면에 균열을 내보자는 의기투합 속 ‘최우량 증거’를 확보한 퐁니 사건으로 국가배상소송이 시작됐다. 이 한 사건은 이기자, 틈을 만들자 약속했다. 그리고 이겼다.

서울중앙지법 정문 앞에서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노트북으로 연결한 영상을 통해 낭독된 응우옌티탄의 소감이다. “오늘 승소하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그날 돌아가신 원혼들에게도 위안이 됐으리라 생각합니다.” 베트남 정부는 선고 직후 기자회견을 이렇게 묘사했다. “탄 여사는 진실을 옹호하는 한국인 친구들과 양심의 소리와 인간의 존엄성을 담은 화상통화를 했다.”

이후 다른 발언자들의 소감이 이어졌고, 응우옌티탄은 화면이 연결된 상태에서 잠시 대기했다. 그가 우는 모습이 보였다. 어떤 울음일까. 그의 변호사로서 나는 그가 우는 모습을 오랜 시간 봐왔다. 죽은 ‘엄마’를 원망하며 차라리 자기를 데리고 가지 왜 이렇게 외롭게 남겨놓았는지 한탄하는 울음. 한국 정부와 한국군에 왜 사과하지 않느냐며 분노하는 울음. 이 소송 1심 변론 과정에 직접 출석해 “8살부터 지금까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부상은 아직도 아픕니다. 그래서 잊을 수 없습니다. 사실대로 판결을 내려주시길 원합니다. 재판장님, 저를 도와주세요”라며 흘리던 준엄한 눈물까지. 부디, 지금의 울음이 이전 울음들과 다르길 바랐다.

기자회견 중 내가 한 발언이다. “이 판결을 학교에서, 군대에서, 사회에서 알리고 가르칩시다. 공동체를 지키는 진짜 힘은 강한 무력뿐만이 아니라, 주저하고 고민하는 군인과 경찰이라는 점을 우리는 최근 목도했습니다. 이 판결을 나누고 기억하면서, 공권력이 폭주했을 때 어떤 비극적 결과가 만들어지는지, 그래서 나라의 힘이 어떻게 통제되고 행사돼야 하는지를 성찰합시다. 우리가 더 나은 사회가 될 가능성이 오늘 판결에 있습니다.”

피고 대한민국은 항소심 불복하며 책임 회피

2024년 12월3일 윤석열의 위헌적인 계엄 선포와 내란 범죄 이후 그가 탄핵되기까지의 시간 중에 위 판결이 선고됐다. 피고 대한민국은 1, 2심 변론 과정에서 명백한 폭력을 부인하고, 온갖 법기술로 책임을 회피했다. 항소심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까지 했다. 과거의 폭력을 부인하는 국가이기에 현재의 폭력이 가능했던 것 아닐까. ‘이 소송을 왜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일관된 답변은 ‘한국 사회를 위해서’다. ‘학살을 듣는 법정’은 평화를 위한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학살의 법정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임재성 변호사

*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가해국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최초의 소송에서 피해자를 대리하며 마주한 순간들, 그 법정 안팎의 이야기를 ‘열두 번의 날짜’를 통해 소개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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