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기울인다, 문경새재 바람 소리에 [경상도의 숨은 명산 문경 봉명산]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마치 땅이 따라오는 듯하다. 우리들 무게를 올려놓고 걷다 보면 땅의 흐름도 몸에 느껴진다. 땅 기운이다. 신체와 지기地氣가 어울려 에너지를 만든다. 거기에 풍경은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한다. 나무와 구불구불한 길, 높고 낮은 산과 파란 하늘, 넓고 환한 강물, 서로가 응답하며 쉬지 않고 자연의 숨결 들려준다.
걷는 일은 생각과 사유의 출발이며 존재의 즐거움 일깨워 준다. 그래서 오늘도 산길을 걷는다. 올라가고 싶은 만큼 오르고, 내려가고 싶으면 언제든 내려갈 수 있는 걸음은 지루하지 않다. 조령천 다리 건너기 직전 강변에 차를 댄다. 추운 강바람에 물줄기 흘러가듯 등산길이 이어진다.
봉명산鳳鳴山(해발 697m)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마성면에 있는 산, 봉황이 울었대서 붙여진 이름으로 주흘산과 마주 보고 있다. 산업화 시대 이 일대에 석탄, 흑연이 전국 생산량의 10%를 차지하던 봉명광업소가 있었다. 등산로 입구 절벽 위의 봉명산출렁다리는 탐방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백두대간 능선, 주흘산, 문경읍, 산마을, 조령천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문경온천 조형물에서 출렁다리, 마고산성, 봉명산 정상을 거쳐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데 대략 8.2km, 4시간 안팎 걸린다.
성채를 닮은 바람의 산들
오전 10시 15분, 등산 안내 표지판(봉명산 정상 4.2km)이 제법 큼직하다. 출렁다리까지 오르는 길은 멀지 않지만 숨이 차도록 제법 가파른 오르막 계단이다. 관산정觀山亭 지나 봉명산출렁다리에 올라서면 확 트인 문경읍의 풍경, 앞에는 이 고장의 진산 주흘산이 우뚝 서서 내려다본다. 영락없이 성채城砦를 닮았다. 흘립屹立한 주흘산, 조령산, 백화산, 희양산, 문경새재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귓불을 시리게 한다. 그야말로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눈바람, 북풍한설北風寒雪이다.
생강·물푸레·감태·당단풍·신갈·박달·전·소나무. 여기저기 노란 잎을 떨어뜨리지 못한 감태나무는 긴 겨울 다 가도록 저렇게 서서 바람에 떨고 있다. 눈물, 콧물에 귀 시리고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은 모자를 확 벗기는데 하마터면 산 아래로 날아갈 뻔했다. 10시 40분 160m 출렁다리(봉명산 정상 3.4km), 잠시 걸어 숲속에 들어오니 바람은 자고 따스한 햇살이 포근하다. 산벚나무, 리기다소나무, 낙엽송 조림지에서 대학병원 인재원 갈림길, 가파른 돌계단 오르는데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 있다. 잠시 올라 다시 내려가는 길, 크고 작은 돌이 덤불과 흩어져 있는데 마고산성이다.
바위와 신갈·감태나무, 왼쪽에서 불어오는 주흘산 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입구는 확실히 바람의 산이다. 추워도 몸에는 땀이 나는데 11시 5분, 나무데크 전망대 두고 지나간다. 곧바로 해발 329m 봉우리, 작은 돌탑 두 개 너머로 주흘산, 조령산이 우뚝 섰다. 성벽을 걷는 듯, 왼쪽 산 아래는 마을과 집들, 낭떠러지, 맞은편이 정상, 오른쪽으로 산세가 길게 흘러내렸는데 예사롭지 않다. 절벽 같은 능선을 벗어나니 산속은 태풍의 중심에 들어온 듯 고요하다. 소나무 고목지대, 귀밑으로 땀이 흐른다. 11시 30분 갈림길(고요2리 1·석화산 2.1·정상 1.4km)에서 몇몇 등산객을 만난다. 이 산에 얼마나 일찍 올라왔기에 벌써 내려오는 것인가?
맞닿아 크는 나무와 석탄산업
소나무 임지에 들어서니 숲이 어둡다. 임도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올라간다. 아늑한 절터 같은 곳, 나뭇가지 사이로 백화산, 조령산, 주흘산이 흔들거린다. 미끄러운 길을 걸어 11시 45분 연리지를 만난다. 남녀의 사랑을 비유해서 사랑 나무로 부른다. 두 나무가 맞닿아 가지가 붙으면 연리지連理枝, 줄기가 붙으면 연리목連理木, 뿌리가 만나면 연리근連理根이다. 바람에 흔들리기 때문에 가지가 이어진 연리지는 잘 보기 어렵다. 저렇게 밤낮 없이 붙어살면 백년해로할 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답답하겠냐고 한다. 어쨌든 나무끼리 서로 가까이 자라면서 맞닿아 한 줄기로 합쳐지는 것이다.
침목같이 튼튼한 나무 계단 길 오르니 봉명산 정상이 가까워진 것 같다. 바람에 시달려 산전수전 다 겪은 듯 더 이상 크지 못하고 주저앉은 신갈나무, 저렇게 몇 백 년을 살 것이다. 바람 소리 쏴쏴 들리는 건너편 산을 바라보며 콧물을 닦는다. 땀 닦고 코 풀고, 손수건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 몰랐다. 12시 10분, 정자가 있는 봉명산 정상에 다 왔다. 사방으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쳤는데 앞쪽에 운달산(1,100m), 뒤로 백두대간 능선 백화산(1,063m), 황학산(912m), 이화령(548m), 조령산(1,026m), 그 너머 희양산(996m) 바라보니 눈이 시리다. 안개 걸린 월악산(1,095m), 주흘산(1,075m). 따뜻한 물 한 잔에 사과 한 입, 잠시 앉아 쉰다. 산에서 만난 이들은 부부인 듯 금실이 너무 좋아선지 민망할 정도다.
봉명산에는 석탄과 흑연이 매장되어 있어 1950년대부터 봉명광업소가 있었던 곳이다. 산업화 시절 태백, 장성 등 강원도 석탄이 전국 7할을 차지할 정도로 국가 에너지 공급 역할을 했다. 보령, 화순 지역도 탄광촌이었지만 문경에도 은성·대성·봉명 등 굴지의 채탄 업체들이 경제를 떠받쳐 왔던 것. 산천초목이 모두 검은 색깔로 뒤덮였지만 당시 탄광 업계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수만 명, 석탄산업이 호황을 누릴 때는 며칠 사이 작은 도시가 새로 생길 정도로 활기가 넘쳤고 돈벌이가 좋아 폐질환에 노출되면서도 광부들이 넘쳐났다. 석탄산업은 연료공급과 기간산업의 중추적 역할을 하며 1980년대까지 번성했으나 가스 보급, 석유 가격 안정화 등으로 수요가 줄자 폐광을 거듭하며 쇠락하기에 이른다.
12시 45분 하산길, 미끄러운 나무 계단을 내려간다. 첫 번째, 두 번째 갈림길 지나 임도 지대는 세 번째 갈림길(석화산 2.4·봉명산 정상 1km)이다. 15분 더 내려가서 산마루 움푹 들어간 안부鞍部, 고요리 갈림길(석화산 2.1·고요2리 1·봉명산 정상 1.4km)에 닿으니 바람이 잔다. 마을 이름대로 숲속은 고요하다. 그런데 소나무는 왜 쓰러졌을까? 가만 생각하니 지난 폭설 때 웃자란 탓에 눈 무게를 못 이겨 넘어졌을 것이다. 아무리 세워주려 해도 도저히 우리들 힘으로 불가능한 일, 애처롭지만 스스로 일어서길 바랄 뿐이다. 오후 1시 15분 작은 돌탑 있는 해발 329m 봉우리에 다시 왔다. 데크 전망대 지나고 20분쯤 더 걸어 마고산성 터에 닿는다. 뒤돌아보면 봉명산 정상, 운달산이 잘 보인다.
마고산성과 청운의 길 문경새재
마고산성麻姑山城은 문경읍과 신라의 고개인 하늘재(525m)로 가는 길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옛날 하늘의 마고할미가 치마폭에 돌을 담아와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가파른 북쪽 절벽을 기대 동·서·남으로 이어진 산성이지만 인근의 고모산성姑母山城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아 지금은 허물어진, 말 그대로 황성옛터다. <증보문헌비고>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각각 요성堯城·聊城 이라 하였고 문경새재 하늘재(계립령), 이화령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고와 고모가 내기를 했다. 마고는 문경읍 마원리, 고모는 마성면 신현리에서 산성을 쌓게 되었다. 하룻밤 사이 궁금해서 마고가 눈여겨보다 고모에게 졌다고 한다. 고모산성은 마성면 신현리 1.6km에 이른다.
오후 1시45분 낙엽송 지대, 대학병원 인재원 갈림길 지나고 2시경 출렁다리에 되돌아왔다. 사람들이 제법 많이 올라왔다. 저마다 휴대폰 카메라로 온갖 자세를 뽐내지만 즐겁게 웃고 떠들 수 있어서 행복할 것이다. 출렁다리를 지나 완만한 능선길, 표지석 없는 석화산(274m) 지나니 탐방객은 보이지 않고 몇몇 등산객만 봉명산 정상으로 걸어간다. 관산정 아래 낭떠러지 같은 긴 나무 계단 끝나는 지점, 등산로 입구 안내판 있는 곳까지 다 내려왔다.
일행은 문경새재로 가려다 청운각으로 방향을 틀었다. 백두대간 조령을 넘는 고갯길, 또는 하늘재에서 이화령까지가 문경새재인데 조령鳥嶺·초점草岾으로도 불린다.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최단 거리로 조선시대 영남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특히 선비들은 추풍령을 추풍낙엽,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진다 해서 오로지 문경새재를 넘어 과거 보러 갔다고 한다. 문희경서聞喜慶瑞라, 여기에서 문경聞慶이 비롯되었으니, 과거에 붙으면 벼슬길 열리는데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 있었겠는가? 이 길을 걸으면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옛길의 고즈넉한 정취, 선인들의 애환과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 생각하는데 잠깐 사이 청운각에 왔다. 여기서 바라보면 봉명산은 문경읍 앞산인 셈이다. 청운각은 문경초등학교와 붙어 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30년대 교사 시절 3년간 하숙하던 집이다. 청운이 아니라 풍운風雲의 뜻을 품고 만주로 갔던 것 아닌가? 우리도 풍운아처럼 걸어 다닐 팔자라 하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한다. 국밥집을 향해 달려간다.
산행길잡이
강변 주차, 온천교 건너서 조형물 ~ 등산로 표지판(등산 기점) ~ 관산정 ~ 출렁다리 ~ 마고산성 ~ 329m봉우리(작은 돌탑) ~ 고요리·정상 갈림길 ~ 임도 갈림길 - 봉명산 정상 ~ 임도 갈림길 ~ 고요리·정상 갈림길 ~ 329m봉우리(작은 돌탑) ~ 마고산성 ~ 출렁다리 ~ 관산정 ~ 등산로 표지판(원점회귀)
※ 대략 8.2km, 4시간 안팎 걸림.
교통
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문경새재 IC)
※ 내비게이션 → 경북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 945 (온천강변1길 27). 온천교 건너기 전 강변에 주차 가능.
숙식 문경새재 및 문경읍, 문경시청(점촌) 근처에 다양한 식당과 호텔·리조트·여관 등이 많음
주변 볼거리
문경새재, 석탄박물관, 문경새재 오픈세트장(드라마 촬영지), 고모산성, 청운각, 문경 도자기박물관, 문경온천 등.
월간산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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