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진출 발판 만들어준 ‘내 인생의 은인’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2003)의 복도 액션 신은 원래 여러 컷으로 분할된 장면이었다. 주인공 오대수(최민식)가 장도리 하나 들고 18명과 뒤엉켜 싸워야 했다. 그런데 박 감독이 현장에서 “원테이크로 가야겠다”고 했다. 처음엔 다들 “그럼 한 번만 찍으면 되겠네”라며 웃었다. 그 ‘한 번’이 이틀을 갔다. 찍고 또 찍다 모두 파김치가 됐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눈이 완전히 풀렸다. 찍는 둥 마는 둥 주먹이 헛나갔다. 이렇게 찍어 어떻게 써먹나 싶었을 때 박 감독이 외쳤다. “OK! 이거야.” 촬영 17번째였다. 탈진한 최민식은 “박찬욱은 놀부”라고 했다. 박 감독은 “20대도 하기 힘든 장면을 노인(최민식은 당시 41세였다)에게 시켜 미안하다”고 했다.
◇박찬욱의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된 인연… “제 인생의 은인”
‘올드보이‘를 찍은 정정훈(55) 촬영감독은 최근 본지 화상 인터뷰에서 원테이크 액션 신을 두고 “지금 봐도 박 감독님 결단은 대단하다”고 말했다. 복도 액션은 해외에서도 극찬하는 명장면이다. 특히 정 감독의 촬영이 일등 공신으로 꼽힌다. 19명이 얽힌 사투를 복도를 따라 좌우로 길게 동시에 유려하게 철저히 계산해 담았다. 정작 정 감독은 “저는 카메라 트랙을 타고 쭉 따라간 것밖에 없다”며 겸손해했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미국촬영감독협회 정회원이며, 한국인 최초의 ‘스타워즈’ 시리즈(‘오비완 케노비‘) 촬영감독이다.
정 감독과 박 감독의 인연은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됐다.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유리‘(1996)로 데뷔한 정 감독은 추진하던 작품이 엎어져 기약 없이 놀고 있었다. 그때 걸려 온 것이 박 감독의 전화였다. “‘유리‘를 좋게 봤다. 작품 같이 하자”고 했다. 그 작품이 ‘올드보이‘다. 두 사람은 ‘친절한 금자씨‘(2005), ‘아가씨‘(2016) 등 6편을 함께 했다. 할리우드 첫 작품도 박 감독의 ‘스토커‘(2013)였다. 박 감독은 과거 인터뷰에서 “촬영감독의 실력은 멋진 화면으로만 평가되지 않는다”며 “중요한 건 작품 해석 능력인데, 정정훈은 그런 면에서 누구보다 탁월하다”고 했다. 정 감독도 “영상보다 이야기 이해에 중점을 둔다”고 말했다.
◇휴 그랜트와 두 번째 작품 ‘헤레틱‘… “배우의 감정을 따라 움직였다”
최근 개봉한 휴 그랜트 주연작 ‘헤레틱‘에서는 정 감독과 배우들의 교감이 돋보인다. ‘헤레틱‘은 폐쇄된 주택에서 벌어지는 밀도 높은 심리 스릴러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 ‘웡카‘에 이어 정 감독과 두 번째로 만난 휴 그랜트는 현지 인터뷰에서 “정 감독이 편하게 찍어줘 현장이 즐거웠다”고 했다. 정 감독의 ‘편안한 카메라‘는 그가 배우로 일해본 경험이 도움이 됐다. 그는 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와 ‘주먹이 운다‘(2005)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둘 다 카센터 직원이었다. 류승완 감독이 “분장 안 해도 카센터 직원처럼 생겼다”며 해보라고 했다. 정 감독은 “칭찬인 줄 알고 실제로도 분장을 안 하고 즐겁게 찍었다”며 “그런 경험들 덕분에 배우의 감정을 따라 카메라를 움직이게 됐다”고 말했다.
할리우드와 한국의 촬영 현장은 다소 다르다고 했다. “할리우드는 네가 최고라며 추켜세우다가도 실수 한 번에 냉정하게 돌아선다”며 “서로를 끈끈하게 보호해 주는 건 한국만 한 데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럴수록 더욱 할리우드에서 입지를 굳게 다지고 싶은 게 그의 목표다. 그는 “박찬욱 감독님은 제 영화 인생의 은인”이라며 “기회가 닿으면 박 감독님과 꼭 다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게 올드보이다” 정정훈이 깨달음을 얻은 박찬욱의 말
영화 ‘올드보이’의 장도리 액션 신은 2분 39초를 달린다. 최민식은 이 장면을 찍고 이틀 만에 몸무게 5㎏이 빠졌다. 배우와 스태프 모두가 탈진한 후에야 만족한 박찬욱 감독은 “이게 올드보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너무 힘들고, 외롭고, 지쳐 보이는 것, 그게 오대수의 여정이고, 그게 올드보이다”라고 했다. 정정훈 촬영감독은 “박 감독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다는 걸 찍고 나서 알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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