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동의 없는 성관계’ 처벌…“가해자 검거율 늘어”
지난 2023년 6월 일본은 형법의 ‘강제 성교죄’(강간죄) 이름을 ‘부동의 성교죄’(비동의 강간죄)로 바꿨다. 저항이 곤란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거나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임을 입증해야만 처벌을 해오다 범죄 성립 사유를 대폭 확대해 ‘동의 없는 성행위’를 처벌하기 시작했다. 일본 형법 역사 116년만의 변화는, 성범죄 피해자는 있지만 ‘범죄’로 인정해 처벌하지 않는 현실을 바꾸기 위한 수많은 피해 여성들의 증언과 시위, 입법 운동 등 시민 사회의 분투로 만들어낸 성과다.
이런 변화를 주도한 일본 시민단체 ‘스프링’(SPRING) 다도코로 유 공동대표가 한국을 찾았다. 스프링은 성폭력 피해 당사자들이 2017년 7월 꾸린 단체다. 다도코로 대표는 15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토론회 ‘강간죄에서 부동의성교죄로-일본 형법 개정의 의미와 과제’에서 법 개정 과정과 이에 따른 변화, 남은 과제 등을 공유했다. 다도코로 대표도 어린 시절 성폭력 피해 당사자로서 2018년부터 단체 활동을 해왔다. “이 형법 개정은 성폭력 피해로 인해 힘들어하는 많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로 이뤄졌습니다. 여기 한국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개정 과정은 험난했고, 단번에 이뤄지지 않았다. 2017년 친고죄 폐지 등을 뼈대로 한 형법 개정이 있었으나, 비동의 강간죄 도입은 미뤄졌다. 다만 개정법에 ‘3년 뒤 재검토’ 부칙을 넣은 뒤 성범죄 판례 130여건 분석과 5899건의 피해 실태조사 결과 등 추가 법 개정 근거를 마련해 법무성(법무부)에 제출했다. 다도코로 대표는 “(2017년 개정 때) 폭행·협박 요건을 삭제하면 (범죄 성립에 대한) 객관적 판단이 불가능해진다는 반대 의견이 있어서 폭행·협박 이외에도 성행위에 대한 동의가 없었던 피해·판결 사례를 분석해 8가지 유형으로 정리해서 제시했더니 반대파, 신중파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8가지 유형은 △폭행·협박 △심신장애 △알코올 또는 약물 △수면 그밖에 의식이 명료하지 않은 상태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형성·표명·유지할 틈이 없는 경우 △공포심·경악 △학대 △경제·사회적 지위 이용 등이다.
그는 성범죄 관련 부당한 무죄 판결에 대해 저항한 ‘플라워 데모’, 언론의 높은 관심, 법무성 회의에 피해 당사자가 참여할 수 있었던 점, 지원 단체들의 공동 노력, 국회의원들과 관계 구축 등을 법 개정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억울한 사람이 성폭력 가해자로 몰릴 수 있다’는 무고 피해에 대한 우려는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의견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도코로는 이런 의견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논리로 반박했다고 설명했다. “먼저 억울한 누명이 발생하는 배경은 수사기관에서의 자백 강요나 증거 수집 문제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내심을 증거로 채택할 수 없기 때문에 ‘부동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요건을 법에 명시하는 게 죄형법정주의(어떤 행위가 범죄인지에 대해 미리 법률로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는 원칙)에 더 맞다고 했어요.” 같은 사건에 대해 1심과 2심 유·무죄 판단이 엇갈린 판례 등 폭행·협박의 정도와 항거불능 상태 판단에 대한 판사들의 해석 편차가 존재한다는 점도 짚었다. “저희는 성범죄 처벌 규정의 본질이 ‘동의 없는 성관계’임을 명확히 하고 처벌 범위도 자세히 명시하면 오히려 무고는 줄어들 것이라고 반박한 거죠.”
그는 또 “우리 단체는 여야 불문하고 국회의원과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의견이 대립되는 지점보다 공통점을 찾아 가치를 공유하고 성폭력 실태와 희망을 전달했다”며 “법무성(법무부)도 저희 의견에 대해 거부 입장을 표명했지만 (법무성이) 거절하기 곤란한 안을 제출하면서 ‘동의’라는 표현을 법안에 담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피해 현실과 법 사이의 간극을 줄일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 마련을 위해 끈질기게 조사·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입법운동을 펼쳤다는 뜻이다. “피해 당사자는 물론 형법학자, 변호사, 심리상담자, 실무담당자 등 관련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치밀하게 논의해서 반박에 대한 논거를 마련하려고 애썼습니다. 법 개정 바로 직전까지도 ‘저렇게 개정하면 저출산을 더 심각하게 만들 것’이라는 등 크고 작은 반발이 이어졌지만, 그건 이미 때 늦은 반발이 됐죠.”
법 개정에 따른 변화는 곧바로 체감할 수 있었다. 성범죄 신고가 눈에 띄게 늘었다. 2024년 기준 성범죄 가해자 검거율과 기소율도 전년 대비 각각 62.9%, 78.4% 증가했다. 다도코로 대표는 “동의 없는 성행위가 처벌 대상이 된다는 메시지를 죄명 변경을 통해 국민에 명확히 전달한 덕분에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신고를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 저희는 (법 개정) 성과를 실감한다”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애초 ‘예스 민스 예스’(Yes means Yes) 모델(상대의 적극적 동의가 없는 성관계를 처벌)로 법 개정을 촉구했으나 2023년 형법 개정은 ‘노 민스 노’(No means No) 모델(상대가 거부 의사 밝혔는데 성관계가 이뤄졌을 때 처벌)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이번 개정으로도 가해자가 피해자의 동의를 받았다고 ‘오해’할 경우, 즉 강간이 가해자의 ‘고의’가 아님을 재판부로부터 인정받게 되면 처벌이 어려워진다. 다도코로 대표는 “성폭력 가해와 피해를 예방하려면 ‘노’(N0)는 ‘노’이고 침묵도 ‘노’이고 대등한 관계에서의 ‘예스’만이 예스라는 성적 동의 개념을 사회 통념으로 삼고 행위자는 상대방의 동의를 명확히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처벌받는다는 규칙을 만들고자 한다”고 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는 더불어민주당(이연희·서미화·전진숙), 국민의힘(김예지), 조국혁신당(정춘생), 진보당(정혜경·윤종오), 기본소득당(용혜인) 등 여야 국회의원들이 국내 224개 단체가 모인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와 함께 주최했다. 2019년 출범한 연대회의는 우리나라에서도 성폭력 판단 기준을 폭행·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바꾸는 운동을 펼쳐 왔다. 2018년 ‘미투’ 운동이 확산하며 제20대 국회에는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담은 법안이 여럿 발의됐으나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폐기됐다. 이날 토론회에 참여한 정춘생·정혜경 의원은 “(법안 발의에 필요한 국회의원 최소 숫자인) 10명을 채우지 못해서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담은 법) 발의를 못 하고 있다”며 다른 의원들을 설득 중이라고 했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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