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행복] 유채꽃보다 찬란했던 어멍의 삶, 들으러 오민?
자식 위해 자신의 ‘봄날’을 희생
해녀들 진짜 이야기 눈길 끌어
공연 끝나면 해산물 요리 한상
연극의 여운 더 느끼고 싶다면
박물관서 해녀들 일생 한눈에


제철, 알맞은 시절을 사는 기쁨만큼 행복한 게 있을까. 이맘때면 어디로 가면 좋을지, 무엇을 해야 즐거울지 궁리하며 방방곡곡으로 떠나본다. 지금 챙겨야 할 행복을 놓치지 말고, 누려보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가장 먼저 제주의 봄이 떠오른다. 제주를 배경으로 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아서일까. 드라마 주인공은 해녀의 딸 애순과 생선 장수 아들 관식. 미우나 고우나 바다에 기대어 사는 평범한 이웃들의 이야기에 시청자는 울고 웃었다. 그중에서도 자식에게 더 나은 삶을 주려 악착같이 살아간 엄마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콕콕 박혔다. 노란 유채꽃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지는 봄의 풍경을 제치고, 가장 제주다운 제주 체험을 찾아 나선 것은 그 때문이다.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제주 동쪽 끄트머리의 한적한 바닷가. 제주공항에서 차로 1시간을 동쪽으로 달리면 닿는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는 ‘해녀의 부엌’이란 극장식 식당이 있다. 연극으로 해녀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이 바다에서 직접 잡아올린 해산물을 이용한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식당 문이 열리고 젊은 연극배우 두사람이 펼치는 30분가량의 짧은 연극이 시작됐다. “딸들은 글자만 알면 다 살아진다네, 욕심 부리지 말고 물질 시키라”는 동료 해녀의 말에 “내 딸들 공부시키는 게 그게 욕심이냐”고 대꾸하는 해녀 ‘춘옥’. 그는 31살에 남편을 잃고 5남매를 홀로 키웠다. 공부를 열심히 해 여자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 꿈은 진즉 바다에 묻었다.
극의 막바지, 옛 해녀 차림을 한 할머니가 등장하자 관객의 시선이 쏠렸다.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인 김춘옥 할머니(88)다. “어린 춘옥아, 그래도 잘 살았다, 춘옥아 수고했다”고 젊은 자신에게 말을 건네며 막이 내리자 관객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3년3개월째 연극 주인공으로 무대에 오르는 김 할머니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내 얘기니까, 그때 그 시절 생각이 떠올라서 눈물이 난다”는 그는 “내 인생 이야기로 박수를 받을 때마다 마음이 울컥한다”고 했다.

공연이 끝난 뒤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로 만든 식사가 이어졌다. 톳흑임자죽, 톳밥, 갈치조림, 뿔소라 꼬치, 흑돼지 돔베고기, 우뭇가사리 양갱, 제주 전통빵인 상웨빵 등 바다가 낳고 해녀의 숨이 묻은 100% 제주산 한상차림이다.
하이라이트는 김 할머니가 들려주는 해녀 이야기다. 해녀는 들어갈 수 있는 바다 깊이에 따라 수심 5m 이하에서 작업하는 하군, 5∼10m에서 일하는 중군, 20m까지 들어가는 상군으로 나뉜다. 13살 때부터 물질을 시작한 김 할머니는 타고난 상군 해녀였다고 한다. 물질하다 돌고래를 만나면 “배알로! 배알로!(내 배 아래로 지나가라)” 주문을 외운다는 이야기부터 “바다에서 가장 무서운 게 욕심”이라며 전복을 많이 따려다 죽을 뻔한 이야기까지 책 몇권은 족히 쓸 수 있을 법한 사연이 쏟아졌다.
체험객 이홍란씨(60·경남 창원시 진해구)는 “해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으며 부모님 생각도 나고, 가슴이 뭉클했다”면서 “제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성에 흠뻑 빠졌다”고 전했다.
못다 들은 해녀 이야기가 아쉽다면 해녀의 부엌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제주해녀박물관’에 들러봐도 좋다. 해녀의 생활·일터·생애를 만날 수 있는 전시 공간이 마련돼 있다. 해녀의 역사와 해녀 공동체에 대한 설명은 물론 빗창(전복을 떼어내는 데 쓰는 도구), 테왁망사리(부표와 그물 주머니) 등 실제 작업도구를 볼 수 있다.
해녀들 사이에선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숨 하나에만 의지해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물질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다. 테왁망사리를 등에 지고, 가족을 등에 지고 사느라 인생의 봄날을 만끽하지 못했을 해녀의 삶에서 우리네 엄마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고생 많으셨습니다’라는 뜻의 ‘폭싹 속았수다’라는 제주말은 꿈을 꾸는 봄이 아니라, 자식을 위해 기꺼이 꿈을 꺾는 봄을 보낸 이들을 위한 헌사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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