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자 조카→명품 포워드→여성 최초 우승 감독 된 박정은 [K스포츠 레전드 열전]

김지섭 2025. 4. 1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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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박정은 부산 BNK 감독
편집자주
현역 시절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스포츠 스타들의 과거와 현재를 집중 조명하는 코너입니다. 종목을 막론하고 대한민국 스포츠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찍어낸 전설들의 화려했던 전성기 시절과 현재의 삶을 조명하고 은퇴 후 제2인생을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자신만의 건강 관리법 등을 함께 들어봅니다.
박정은 BNK 감독이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선수 시절 '명품 포워드'로 불리며 큰 사랑을 받았던 박 감독은 여성 지도자 최초로 여자프로농구 우승을 차지하는 새 역사를 썼다. 강예진 기자

현역 시절 ‘명품 포워드’로 불렸던 한국 여자농구 레전드 출신 박정은 부산 BNK 감독이 지도자로도 명품이 됐다. 그간 여자프로농구에서 이옥자, 유영주 등 스타 출신 감독들이 수차례 두드렸던 우승의 벽을 깨부수고 여성 사령탑 최초로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2021년 3월 약체로 평가받던 팀의 지휘봉을 처음 잡아 4년 만에 이뤄낸 우승이다. 2022~23시즌 정규리그 2위로 챔피언 결정전에 올라 3전 전패로 고개를 숙이고, 2023~24시즌 정규리그 최하위로 추락했던 아픔을 딛고 정상에서 포효했다.

선수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4강과 2002년 세계선수권대회 4강 쾌거를 이루고, 지도자로도 꽃을 활짝 피운 박 감독은 정작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선을 그었다. 최근 한국일보 사옥에서 만난 박 감독은 명품이라고 꼭 화려한 건 아니라면서 “오랫동안 그 위치에 그대로 있고 어딜 가도 빛나는 명품이 있는데, 명품 포워드라는 별명도 그런 의미를 담아 붙여진 게 아닌가 싶다”고 밝혔다. 이어 “개인적으로는 감독이 제일 좋아했고, 필요로 했던 선수라는 표현이 좋다”며 “지도자가 된 지금도 선수들이 화려함보다는 팀을 생각하고 한발씩 양보할 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 나온다”고 덧붙였다.


박신자 조카라고? 러브콜에 농구공 잡아

동주여상을 졸업하고 삼성생명에 입단했던 박정은.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 감독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평범한 학생이었다. 오빠가 농구를 먼저 시작한 것과 달리 박 감독은 운동에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 학교에 남자농구 팀만 있어 공을 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인근 학교 여자농구 팀에서 관심을 받았다. 오빠가 농구를 하고, 여자농구 전설 박신자 여사의 조카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나도 덩치가 있는 데다가, 박신자 조카라는 얘기가 나오니 더 구애를 보냈다”며 “워낙 성격이 내성적이라 농구가 부담스럽고, 공을 잡는 게 쑥스러웠다”고 돌아봤다.

부산 괘법초 농구부 감독의 설득으로 4학년 말 전학을 간 박 감독은 역시 피를 못 속였다. 고모의 DNA를 물려받아서인지 농구 센스가 좋았고, 실력도 쑥쑥 늘었다. 박 감독은 “농구를 하다 보니까 성격도 바뀌었다”며 “다양한 상황을 직면하고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고 설명했다. 승부욕도 또래 친구들보다 강했다. 그는 “승부욕이 남달랐다”며 “어떤 걸 내가 해야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끊임없이 찾았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건 동주여중 2학년 때다. 1학년 당시만 해도 키가 160㎝ 초반대로 크지 않았다. 팀 내에서 두세 번째로 작은 신장이었다. 그러나 1년 뒤 무릎이 아파 쉬긴 했지만 단숨에 키가 15㎝가량 컸다. 박 감독은 “가드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센터만큼 커졌다”며 “가드를 볼 때 다른 포지션을 이해한다는 생각을 갖고 뛰어서 다른 포지션에서 뛰어도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했다.


고모의 그늘 벗어나 ‘박정은’으로

박정은 감독은 현역 때 삼성생명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뛰며 등번호 11번을 영구결번으로 남겼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중학교 2학년 시절부터 삼성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유망주였던 박 감독은 늘 고모의 그림자와 싸웠다. 박신자 여사는 1967년 국제농구연맹(FIBA)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을 이끌며 최우수선수(MVP)에 뽑혔다. 2015년 대한체육회 스포츠 영웅에 선정됐고, 2020년 아시아 국적 최초로 FIBA 명예의 전당 선수 부문에 헌액됐다.

박 감독은 “중·고등학교 때 ‘박신자 조카’, ‘역시 피는 못 속인다’, ‘센스는 타고났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물론 고모에게 물려받은 것도 있고, 항상 고모를 존경했다. 다만 한편으로는 그냥 나로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내심 있었다”고 털어놨다.

청소년 대표팀 등 엘리트 코스를 거친 박 감독은 결국 실력으로 가치를 입증했다. 동주여고를 졸업하고 1995년 삼성생명에 입단한 그는 실업 무대 첫해 춘계대회 신인상을 받고 화려하게 데뷔했다. 아울러 1998년 출범한 여자프로농구(WKBL) 원년 멤버로 2013년 은퇴 순간까지 삼성생명의 5차례 우승을 이끌었다. ‘명품 포워드’로 큰 사랑을 받았던 그의 등번호 11번은 영구결번으로 남았다.

현역 시절 박 감독은 농구를 알고 하는 선수였다. 특별히 운동 능력이 좋진 않아도 코트를 보는 시야가 넓고, 경기의 흐름도 잘 읽었다. 정확한 외곽슛도 장착해 WKBL 최초로 통산 3점슛 1,000개를 달성했다. 박 감독은 “나만의 스타일로 꾸준히 농구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주변에서 박정은을 먼저 떠올리더라”면서 “열심히 달린 보람이 있다고 느꼈다”고 뿌듯해했다.


시드니 올림픽, 세계선수권 4강 쾌거

시드니 올림픽 4강행 소식을 전한 본보.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 감독은 태극마크를 달고 한국 여자농구의 황금기를 만들었다. 1995년 아시아선수권대회 당시 처음 성인 국가대표에 발탁된 그는 이듬해 바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무대도 밟았지만 첫 올림픽은 10위로 아쉽게 마쳤다. 박 감독은 “애틀랜타 땐 완전 막내였다. 대표팀 스태프가 없어 스코어북을 적고 매니저처럼 지냈다”면서 “결과적으로 성적은 안 좋았으나 올림픽 경험과 훈련 과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큰 도움이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두 번째 올림픽인 2000 시드니 대회는 주전으로 나섰다. 직전 대회 부진 탓에 여자농구를 향한 관심이 크지 않았지만 대표팀은 치열한 조별예선을 뚫고 8강 토너먼트에 올랐다. 8강전에서 유럽의 강호 프랑스를 꺾는 이변을 일으킨 대표팀은 4강전에 세계 최강 미국을 만나 분패했다. 3~4위전에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은메달 이후 첫 메달을 노렸으나 브라질과 연장 접전 끝에 아쉽게 졌다. 비록 메달은 없었어도 세계 정상권과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얻었다.

시드니 올림픽 예선에서 러시아를 연장 끝에 꺾고 기뻐하는 대표팀.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 감독은 “전성기에 있던 선배들이 대표팀에 다 모였다. 브라질과 연장에서 정선민, 정은순 선배가 키 큰 상대를 막느라 5반칙으로 나갔고, 전주원 선배도 5반칙이었다”며 “메달을 놓친 게 아쉽지만 우리가 4강에 올라갔을 때 현장 반응은 대단했다. 우리 수준에 놀라고, 감탄했다. 4강에서 미국 대표팀 감독도 우리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고 떠올렸다.

시드니 올림픽 성과를 바탕으로 2년 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또 한번 4강 성과를 남겼다. 여자농구가 세계선수권 4강에 진출한 건 1983년 브라질 대회 이후 처음이었다. 이 대회에선 시드니 올림픽 때 패배를 안긴 브라질을 8강에서 만나 통쾌하게 설욕했다. 박 감독은 “우리가 힘이 있다는 걸 브라질에 보여줬다”며 “올림픽에서 4강을 찍었기 때문에 세계선수권도 당연히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지도자도 선수 때처럼 ‘명품’

'언니 리더십'의 박정은 감독이 우승을 이뤄낸 제자 박혜진(왼쪽), 안혜지(오른쪽)와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예진 기자

국가대표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현역 생활은 2012~13시즌을 마지막으로 마침표를 찍은 박 감독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삼성생명에서 코치로 지도자 경험을 쌓았다. 2018년부터는 WKBL 경기운영부장, 본부장을 지냈고 마침내 2021년 3월 고향 팀 BNK의 2대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박 감독이 지휘봉을 잡을 때만 해도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앞서 초대 사령탑이었던 유영주 감독은 창단 첫 시즌인 2019~20시즌 10승 17패로 6개 팀 중 5위, 2020~21시즌 5승 25패로 최하위 성적을 냈다. 박 감독은 ‘언니 리더십’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자율적인 훈련 분위기를 조성하고, 경기 중 위기 상황에는 차분하고 세심하게 선수들을 지휘했다. 그는 “선배님들이 성적은 안 좋았을 수 있지만 계속 도전을 해왔기 때문에 나한테까지 기회가 온 것”이라며 “기회를 살리고 싶었다.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회상했다.

그 결과, 팀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박 감독이 처음 이끈 2021~22시즌 4위(12승 18패)에 올라 창단 첫 플레이오프 티켓을 따냈다. 2022~23시즌엔 2위(17승 13패)를 차지한 뒤 챔피언 결정전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첫 우승은 쉽게 닿지 않았다. 당시 챔프전에서 아산 우리은행에 3전 전패를 당했고, 2023~24시즌 다시 꼴찌(6승 24패)로 추락했다.

미소 짓고 있는 박정은 감독. 강예진 기자

박 감독은 절치부심했다. 다시 팀을 재건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고, 구단도 외부에서 우승 DNA를 갖춘 박혜진과 김소니아 등을 영입해 힘을 실어줬다. 2024~25시즌 정규리그에서 선두를 달리던 BNK는 막판 우리은행에 밀려 2위로 마쳤으나 ‘봄 농구’에서 화끈하게 설욕했다. 우리은행과 챔프전 리턴 매치를 벌여 3전 전승으로 되갚고 창단 첫 우승을 이뤄냈다.

이로써 박 감독은 프로농구 사상 최초의 여성 우승 사령탑으로, 여자농구 최초의 선수와 감독 우승을 경험하는 새 역사를 썼다. 박 감독은 “선수 땐 시키는 대로만 훈련했고, 감독이 돼선 팀 구성부터 훈련까지 모두 직접 준비했다. 그러다 보니 선수로 했던 우승보다 의미가 더 깊다”며 “직접 뛰는 것보다 선수들이 주는 기쁨이 크다”고 감격했다.

김지섭 기자 on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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