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서 행복해야 좋은 정치, 일방 독주 정당은 미래 없다"

2025. 4. 12.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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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 ‘고전으로 읽는 민주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프랑스의 조각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샤를 라플랑트 (Charles Laplante. 1867~1900)의 판화.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이 아닌 인간은 완전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고 보았다. [사진 위키미디어]
플라톤은 신의 변덕과 자연의 폭력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인간에게 국가를 잘 설계하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지식(철학)의 힘이 그 일을 가능하게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을, 사람들은 ‘철인정치론’이라 부른다. 오늘날에도 통치권을 위임받고자 하는 정치가들은 지식인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분야별 정책을 공약하고 국정을 이끌 식견을 보여 주려 노력한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시작된 일이다.

플라톤은 바른 정치, 정의로운 국가의 이데아를 꿈꿨다. 분열된 사회를 ‘대변혁’하고 극단의 정치를 ‘대개조’해서 완전한 국가를 만들려 했다. 그가 펼친 ‘이상 국가론’은 가장 오래된 혁명론이다. 지금 같은 포퓰리즘 정치나 팬덤 민주주의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본다면 플라톤을 읽어야 한다.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정치는 철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이 아닌 인간이 완전한 국가를 만들 수는 없다고 보았다. 현실을 부정하기보다 현실을 존중해 점진적인 개선책을 모색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국가 운용술 정치가 좋아야 시민 삶 편안
플라톤이 세상을 떠난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나 12년 동안 그리스의 이곳저곳을 돌며 다양한 비교 연구를 했다. 그는 하나의 이상적 국가가 아닌 실제의 다양한 국가를 경험하고 비교하고 유형화했다. 그런 다음 아테네로 돌아와 새로운 학교(리케이온)를 열었다. 오전에는 전문 연구자를 위해 철학과 논리학을 강의했다. 오후에는 공개강좌로 정치학과 수사학, 윤리학을 강의했다. 이때 다룬 정치학 강의를 나중에 제자들이 묶어 낸 책이 『정치학』이다.

플라톤은 인간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지식의 개념을 창안했다. 국가와 정체, 정의와 올바름, 덕과 선, 법과 도덕, 퇴행과 혁신, 타락과 교육 등이 대표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이 만든 개념을 따랐다. 다만 방법과 체계는 다르게 해서 자신만의 이론과 실천론을 만들려 했다. 그것이 스승에 대한 최고의 존경이라 여겼다.

프란체스코 하예즈(Francesco Hayez)의 삽화 ‘아리스토텔레스’(1811년 작). [사진 위키미디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이렇게 시작한다. “국가는 공동체다. 공동체는 어떤 좋음(선)을 실현하고자 만들어진다. 인간 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바를 실현하는 데 있다. 여러 다른 공동체를 포괄하는 공동체이자, 좋음을 가장 훌륭하게 추구할 수 있는 으뜸의 공동체는, 국가라고 불리는 정치 공동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란 국가 운영술이다. 정치가 좋아야 국가가 좋다. 국가가 좋아야 시민 삶도 좋다.

인간은 ‘좋은 삶’을 목적으로 삼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그런 삶은 국가를 이루어 살 때 가능하다. 무국적 난민이나 국가를 잃은 식민 상태에서 좋은 삶을 구현할 수 없다. 국가 없이 세상의 여행자처럼 살 수도 없다. 행복한 가정도, 보람 있는 직업도 모두 국가에 속해서 살 때 가능하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국가를 필요로 하는 정치적 동물이다. 국가 없이 살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인간 이하이거나 인간 이상일 것이다.”

국가란 ‘큰 가정’도 아니고 ‘지구 공동체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도 아니다. 국가를 잃으면 가정도 정당도 기업도 노조도 가치 있는 역할을 할 수 없다. 뭔가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자신의 국가, 자신이 속한 정치 공동체를 잘 가꾸어야 한다. 좋은 국가여야 지구 공동체도 돌볼 수 있다. “국가는 그저 사는 삶, 모여 사는 삶을 넘어,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정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시대로서는 매우 특별한 다원주의적 정치관을 발전시켰다. 그는 “국가의 지나친 통일성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많고 다양해야 비로소 국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로만 이루어진 공동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군사동맹이나 부족”이다. 정치의 군사화나 부족주의 정치는 국가의 길이 아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일당제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국민의힘당의 나라이거나 더불어민주당의 나라이기만 하면 미래는 없다.

카를 마르크스
이견을 존중해야 좋은 국가다. ‘달라서 괴롭다’가 아니라 ‘달라서 풍요롭다’고 할 수 있어야 좋은 정치다. 민족적·당파적 동질성을 강요하는 정치는 평화로운 사회가 아니라 적대적인 사회를 만든다. 다른 것을 같게 만드는 것은 어리석다. “합주 없는 단선율이나 한 박자로만 된 리듬”이 불완전하듯, 하나의 의견이 지배하는 국가에서는 서로를 해치는 일을 덜 두려워한다. 그 길은 시민의 윤리가 아닌 전사의 윤리를 북돋는다. 그런 국가는 “전쟁과 같은 시기에는 잘 작동하지만, 평화의 시기가 되면 활력을 잃고 몰락한다.”

“다원적 복합체에서 점점 더 단일한 통일체가 되어 갈수록” 국가는 가족주의에 가까운 특징을 갖게 된다. 규모가 커질수록 공동체는 다원적이어야 한다. 노사 가족주의보다는 노사 간의 합리적 협상과 교섭이 필요하듯, 정당도 그래야 한다. 정당의 규모는 커졌는데 당내 다원주의가 억압되면, 정당도 가족이나 군대처럼 작동한다. 당내 이견을 내부 총질로 몰아세우면 전체주의 정당이 될 수 있다, ‘개딸’과 ‘개아버지’ ‘개삼촌’ ‘개이모’들의 가족이 지배하는 무례한 정당을 만들 수 있다.

“혼자서만 행복한 국가”를 만들 수는 없다. “한 국가에 대해 행복을 말할 때는 시민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원칙에 따라 올바른 정체와 그른 정체는 이렇게 정의된다. “공공선을 추구하는 정체는 올바른 정체요, 정치가의 개인 이익만 추구하는 정체는 그른 정체다.” 오늘날의 정치 언어로 말하면, 정당과 파당의 차이와 같다. 정당은 체제 전체의 역량을 키우는 정치 집단을 뜻한다. 파당은 자신들만의 배타적 이익을 도모하느라 국가를 분열시키는 사익 집단을 가리킨다.

게오르크 헤겔
정치는 다툼을 동반한다. 갈등은 정치의 일상이다. 다만 자신만을 위한 다툼이 아니라, 누가 더 공공선의 진작에 책임성을 갖는가를 둘러싼 경쟁이어야 한다. 공동체를 분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분열을 치유하기 위한 경쟁이어야 한다. 정치의 세계가 다른 생각들의 경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국가라는 같은 공동체가 서로 다른 것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국가 안에서는 여러 가지 생활 방식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기능과 역할은 서로 다른 사람이 맡아야 한다.” 요컨대 정치는 오케스트라처럼 다원적 복합체로 이해되어야 하고 다름을 화음으로 만들 실력을 요구한다.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켜 ‘중용의 정치론’을 말한 사람이라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좌도 우도 아닌 중도나 이도 저도 아닌 중간을 옹호했다고 해석하면 잘못이다. 대표적인 중용의 예는 용기다. 한쪽 극단은 비겁함이나 소심함이다. 다른 한쪽 극단은 만용이나 무모함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극단이란 자기 결정 없이 상황 논리에 따르고 추종하는 선택이다. 그에 비해 용기는 스스로에게서 발원하는 자발적 결정이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맹렬히 실효적 대안 찾는 게 중용의 정치
본래 헬라어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은 완성에 가까운 의미였다. 즉 최선이라는 것이다. 다만 플라톤이 말한 ‘이상적’ 최선이 아닌, 인간의 한계를 존중하는 ‘현실적’ 최선을 뜻한다. 플라톤의 ‘재산 공유제’를 비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부에 대한 탐욕의 원인을 재산이 아닌 인간의 사악함에서 찾았다. 인간이 선하기만 하다면 좋은 정치도 교육의 역할도 그렇게 절실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선은 귀하다. 선한 삶, 훌륭한 국가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현실에 대해 환상을 갖지 않았다.

국가는 다른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정치적 삶이란 언제나 다르게 옳은 것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이때 여론이나 대세를 좇는 정치를 ‘아첨 정치’라 하며, 그 길에서 기회를 잡고자 하는 정치를 ‘선동 정치’라 한다. 이런 정치는 공공선을 북돋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적대와 증오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중용의 정치는 아첨 정치와 선동 정치에 대한 소극적 대안이 아니라 적극적 안티테제다. 정치가 잘못 가고 있다면 용기를 잃지 않고 비판하는 것, 실효적 대안을 찾아 맹렬하게 달려드는 것, 그것이 중용의 정치다. 그런 정치가 가능해야 국가가 바르게 선다.

플라톤의 『국가』는 ‘철학자(소크라테스)를 살해한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한 항소이유서였다. 말년의 아리스토텔레스도 나쁜 정치를 피해 아테네를 떠나야 했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소크라테스에 이어) 철학에 다시 죄를 짓는 것”을 피하려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는 어머니가 살던 섬으로 돌아갔고 그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저세상에서 플라톤이 기다리고 있었다면, “자네의 현실주의적 정치관도 사나운 정치 현실을 감당해 내지 못했군”이라고 하며 위로했을지 모른다. 플라톤의 『국가』가 ‘이상적이어서 혁명적’일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그 반대로 ‘현실적이어서 불온한’ 고전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 『정치학』

「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다. 40살 이상 나이 차가 나니, 사실 다른 세대다. 원숙한 플라톤 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놀라운 지적 성장을 이뤘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명문 귀족 가문 사람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에서 유학을 온 이방인으로 참정권이 없는 비시민이었다. 정치를 보는 두사람의 관점은 달랐고, 달랐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의 『국가』에 견줄 수 있는 불멸의 고전을 썼다. 오늘 두 번째로 읽을 『정치학』이 그것이다.

박상훈 정치학자.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으로 고려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한 특유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글을 써왔다. 다작의 작가로 최근엔 『혐오하는 민주주의』 『정치적 말의 힘』 『청와대 정부』 등을 펴냈다. 유명 칼럼니스트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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