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헌법 불합치 6년이 넘었는데…안전한 임신중지는 아직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 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시민단체는 물론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속한 입법 촉구에도 진전이 없는 상황을 두고,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해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촉구하는 단체 모임인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네트워크)는 11일 성명을 내어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 6년이 지나도록 정부와 국회는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해 어떠한 구체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며 “여전히 청소년과 이주민, 난민, 장애인, 가정폭력이나 젠더폭력에 처한 사람, 사회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많은 사람이 이른 시기에 안전한 임신중지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네트워크는 “전 세계 90여 개국이 사용 중인 유산유도제는 ‘낙태죄’가 폐지된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입법 미비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승인이 거부되고 있고, 보건복지부는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의료 보장 체계에 대해서는 현황 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네트워크에는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시민건강연구소, 한국여성의전화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임신중지를 필수의료서비스로 보장하고 모든 임신중지에 건강보험을 적용할 것 △모든 의료기관에서 안전한 임신중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의료·상담 지침을 배포하고 의료적 권리 보장과 연계 체계, 정보 제공 체계를 마련할 것 △유산유도제를 승인할 것 △모자보건법을 전부개정할 것 등을 촉구했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11일 형법상 낙태죄 조항이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리고, 국회에 2020년 말까지 형법을 개정하라고 요청했다. 2020년 정부는 안전한 임신중지가 가능한 의약품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21대 국회(2020년 5월∼2024년 5월)에서 형법 개정안(정부안 포함 6개)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정부안 포함 7개)이 발의됐지만, 모두 임기 종료로 폐기됐다.
차일피일 입법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 지난해 9월 국가인권위원회도 보건복지부 장관과 식품의약품안전처장에게 안전한 임신중지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아 여성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며 제도 개선을 권고했다. 인권위 차별시정위원회는 복지부 장관에게 임신 중지 관련 의료 서비스를 공공보건의료 전달 체계 내에서 보편적으로 제공하고 건강보험을 적용하라고 권고했다. 또 현행 모자보건법상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조항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법률 개정을 추진하라고도 했다. 식약처장에겐 임신중지 의약품을 도입해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할 것을 권고했다.
이런 사정에도 여전히 정부와 국회는 입법에 적극적이지 않다. 복지부와 법무부는 21대 국회 시절과 달리 지난해 5월 말 임기를 시작한 22대 국회에 정부안을 내지 않고 있다. 국회에서도 관련 개정안을 발의한 의원이 없다. 김성이 시민건강연구소 건강형평성연구센터장은 “복지부는 스스로 추진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국회에 떠넘기고 있고, 국회는 종교계 등의 눈치를 보느라 입법에 적극적이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입법이 이뤄지지 않다보니 임신중지와 관련한 제도도 마련돼 있지 않다. 이때문에 세계보건기구(WHO)가 필수 의약품 목록에 올려놓은 임신 중지에 필요한 의약품인 미페프리스톤, 미소프로스톨 등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다. 또 임신 중지에 대한 상담을 제공하고 임신 중지 약물을 배송해주던 캐나다 비영리단체 ‘위민온웹’에 대한 접속도 방송통심의위원회 처분에 따라 일부 차단돼 있다. 이와 관련해 식약처 관계자는 유산유도제 허가에 대해 “형법, 모자보건법 개정으로 약물에 의한 임신중지 허용 및 임신중지 허용 기간이 법률로 정해져야 허가심사가 가능한 일부 허가요건자료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때문에 정부가 입법 공백을 이유로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체계 구축에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는 “복지부가 전국 산부인과를 대상으로 임신중지 현황을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계 체계를 만드는 등 비공식적 영역에 있는 임신중지를 공식적인 의료 영역으로 들어오게 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며 “한국과 비슷한 시기에 낙태죄가 비범죄화된 해외 국가들은 행정부 책임하에 관련 의료체계를 구축했다. 차기 정부에서는 반드시 이런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윤주 기자 ky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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