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고엔 고짓센"을 말해보라 [아침을 열며]

2025. 4. 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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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엔 고짓센(15엔 50전)."

자경단은 죽창을 들고 조선인이 잘 발음하지 못하는 일본어인 "주고엔 고짓센"을 발음해 보라고 요구했다.

이 문서에선 조선인의 언어 행태에 대해서도 거론하는데, 조선인들은 "탁음 발음을 못한다", "'라리 루레로'를 분명하게 발음하지 못한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죽창을 들고 "주고엔 고짓센"을 말해보라던, 무고한 조선인들을 학살했던, 일본인들의 광기와 뭐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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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년 전 광기가 부른 대학살
조선인에 대한 차별에서 비롯
계엄 후 우리 행태도 반성해야
2월 16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 심은 나무에 '화교 짱깨 대청소'라는 혐오표현이 적힌 광고물이 부착돼 있다. 최주연 기자

"주고엔 고짓센(15엔 50전)."

자경단은 죽창을 들고 조선인이 잘 발음하지 못하는 일본어인 "주고엔 고짓센"을 발음해 보라고 요구했다. 발음이 자연스럽지 않은 조선인들은 그 자리에서 가차 없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지금으로부터 102년 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간토 지역에서 진도 7.9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10만여 명이 사망하고, 경제 피해 규모가 당시 국민총생산의 약 37%에 달한 이 자연재해는 조선인을 향한 혐오에 불을 지폈고 이어서 대규모 조선인 학살이 벌어졌다. 이 학살로 공식적으로 인정된 조선인 사망자만 6,661명에 달한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약 2만 명이었는데, 대학살로 자그마치 한국인 세 명 중 한 명이 사망한 셈이다. 일제 식민지배 시기였던 그때 상당수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호황을 맞은 일본 경제는 값싼 노동력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조선인들은 주로 수도, 토목공사의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대학살은 일본 정부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으며, 학살의 주체로 공권력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까지 모두 가세한 유례없는 야만 행위였다. 대지진 직후, 도쿄시, 요코하마시, 치바현, 사이타마현, 군마현 등지에서 민간 자경단원들이 한인들에 대해 무자비한 학살과 폭행을 자행했다. 이 학살은 일본 경찰이 "조선인이 쳐들어오니 여자와 어린이는 빨리 안전지대로 피난시키라"는 '한인 습격'이라는 유언비어로 격화되었다.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은 의도적으로 유언비어를 조작하고 배포했는데,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강간을 하였다" 등의 유언비어는 대지진 후 불안정한 상황에서 일본인들에게 숨겨져 있던 광기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인들에 대한 혐오는 대지진 후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미 1913년에 일본 정부는 전국 경찰이나 관청 창구 등에서 조선인을 식별할 수 있도록 '조선인 식별 자료에 관한 건'이라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 문서는 조선인을 언동에 따라 '갑', '을', 그리고 '기타'로 구분하였는데, '갑'은 일본에 반항적이며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인물로 다섯 명의 미행이 붙었다. 이 문서에선 조선인의 언어 행태에 대해서도 거론하는데, 조선인들은 "탁음 발음을 못한다", "'라리 루레로'를 분명하게 발음하지 못한다"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발음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센징(鮮人·조선인)이다"라는 외침과 함께 인간 사냥이 시작되던 그때의 광기가 계엄 사태 후 우리나라 광장에서도 보였다. '헌법재판소 공보관 발음이 이상해서 중국인으로 의심된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한 연구관의 이름이 중국인 같다면서 국적을 의심하더니 이 연구관의 신상을 뒤졌다. 일부 시위 참가자들은 경찰을 향해 "관등성명을 밝혀라"고 요구하며, 휴대폰으로 얼굴을 촬영하였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공안으로 의심되는 경찰이 관등성명을 못 대고 공무원증도 제시 못 했다"며 "중국인 아니냐" "짱깨 경찰"이라는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또 어떤 시위 참가자들은 지나가는 시민을 붙잡고 "멸공?"이라고 물으며, 어느 편인지 정체성을 밝히라고 다그쳤다.

죽창을 들고 "주고엔 고짓센"을 말해보라던, 무고한 조선인들을 학살했던, 일본인들의 광기와 뭐가 다른가. 우리 광장에서 보였던 이 비민주성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정회옥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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