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의 명화산책] 빛나는 삶의 순간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강현철 2025. 4. 9.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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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철 논설실장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Bal du moulin de la Galette). 1876년, 캔버스에 유화. 131 x 175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조르주 샤르팡티에 부인'. 1876~1877년.
'아르장퇴유 정원에서 그림 그리는 클로드 모네'. 1873년.
'양산을 쓴 리즈'. 1867년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는 프랑스의 대표적 인상주의 화가다. 같은 인상파 화가인 클로드 모네의 절친이기도 하다. 르누아르가 세상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드러낸건 1874년 4월 사진작가 나다르의 파리 스튜디오에서 모네, 피사로, 드가, 세잔, 시슬레, 모르조 등과 함께 개최한 역사적인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다. 보수적 살롱전에 반기를 든 이 전시회엔 30여명의 화가들이 165점의 작품을 내놓았다.

1877년 3차 인상주의 전시회에 전시된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Bal du moulin de la Galette, 1876년)는 그의 역작 중 하나다. 물랭 드 라 갈레트는 19세기말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던 야외 선술집으로, 당시 일요 무도회로 유명한 대중적 사교의 장소였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젊은 파리의 연인들이 담소를 나누며 식사도 하고 야외무대에서 춤도 췄다. 르누아르의 작업실은 여기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르누아르는 이런 광경을 화폭에 담기 위해 6개월간 매일 찾아 수많은 스케치와 습작을 그렸다. 고흐와 로트렉도 '물랭 드 라 갈레트'라는 작품을 남겼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는 근사하게 차려입은 노동자 계급의 젊은 파리지앵들이 즐겁게 춤추고 사교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며 빛나는 인물들과, 무도회장의 시끌벅적한 모습이 생생하다.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색의 변화를 유연한 터치와 빠른 붓놀림으로 표현했다. 밝고 어두운 색의 조화, 알록달록 흩어지는 빛의 처리 등이 그림에 깊이와 생동감을 주고 있다.

얼굴, 옷, 무도회장 바닥, 나무는 온통 주황색과 노란색, 파란색과 하얀색 등 빛점으로 얼룩덜룩하고 인물들의 윤곽선은 거의 없다. 화면의 형체를 세세하게 표현하는 대신 짧은 붓질로 색채를 분할, 빛나는 광택을 표현했다. 검은색을 사용하지 않고 그림자도 짙은 푸른색을 활용했다. 춤추는 무리의 머리 위에는 야외무대를 밝히는 흰색 가스등이 그려져 있다. 르누아르는 전업 모델 대신 친구들과 이곳에 자주 드나들던 노동 계급의 여성들을 모델로 했다. 부유했던 인상파 화가 귀스타브 카유보트는 이 그림을 사들여 르누아르를 후원했으며, 후에 주인은 프랑스 정부로 바뀌었다.

르누아르는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하고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철학을 작품뿐만 아니라 삶에서도 지켜왔다. 가난해 빈 물감 튜브를 짜면서 작업을 했고, 말년에는 관절염으로 손가락 관절들이 마비됐지만 붓을 팔에 묶어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느린 왈츠의 느낌인 춤을 주제로 한 '도시에서의 춤', '시골에서의 춤'처럼 언제나 행복하고 즐거워하며 그림을 그렸다. 패션에도 관심이 많았다. 섬세한 붓터치로 '오트 쿠튀르'(고급 의상)의 아름다운 장인 드레스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조르주 샤르팡티에 부인'은 장중한 정장과 딱딱한 격식에서 벗어나 오트 쿠튀르의 세련된 드레스와 액세서리로 치장한 귀부인을 그렸다.

1841년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로 프랑스 리모주에서 태어난 르느아르는 네살때 가족을 따라 파리로 이사했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루브르 박물관 근처에 집을 얻었다. 미술보다 음악에 더 재능이 있던 그는 음악을 배우다가 13세때 집안 형편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도자기 공장에 취직한다.

공장에서 도자기 표면에 그림을 그리고 해외 선교용 종교화와 부채의 장식용 그림에도 손댔던 르누아르는 짬이 날때마다 루브르로 달려가 거장의 명화에서 영감을 얻고 위로를 받았다. 루브르는 그에게 안식처이자 미술학교였던 셈이다.

21세때인 1862년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으며, 신고전주의 화가 샤를 글레이르(Charles Gleyre)에게서 수업을 받았다. 글레이르의 화실에서 그는 모네, 시슬레, 릭 바지유를 모델로 '알프레드 시슬레의 초상화' (1868), '화실의 프레데릭 바지유(1867), '아르장퇴유 정원에서 그림 그리는 클로드 모네'(1873) 등의 그림을 남겼다.

그가 빛을 보기 시작한 건 27세인 1868년 살롱전에 출품한 '양산을 쓴 리즈'에서부터다. 야외에서 그린 이 그림은 인상주의의 초기 특성을 지녔다.

르누아르는 1860년대 말 모네와 함께 야외에서 함께 같은 풍경을 그리곤 하였다. 그의 '라 그르누이에르'(1869)와 모네의 '라 그루누이에르에서의 목욕'(1869)은 센강변의 섬을 그린 그림이다.

1881~1882년 알제리, 스페인, 이탈리아를 여행한 그는 인상주의 회화 기법에 회의를 갖기 시작한다.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티치아노 등의 작품에서 고전주의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했으며, 형체를 분명히 표현하는 선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후 그려진 그의 그림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긴 하지만 흐릿한 색조나 단절된 붓질보다는 형체, 선과 윤곽, 양감 등이 강조됐다. '머리를 땋고 있는 소녀' (1885), '피아노 앞의 소녀들'(1982), '금발의 목욕하는 여인'(1882), '목욕하는 여인들'(1884~1887)에선 고전주의 회화 양식이 풍겨난다.

아이나 여인, 친구와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묘사, 밝고 기분좋은 에너지를 전파하는 그림을 그린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과 무명 시절을 견뎌내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삶의 행복한 순간을 잡아냈다. 생애 마지막 20년 관절염으로 고생했지만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919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도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 "이제야 그림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말을 남겼다. 미술평론가 정연복씨는 "르누아르의 작품엔 생의 에로스적 에너지와 행복감이 충만해 있다"고 평가했다.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는 센강을 사이에 두고 루브르 박물관과 마주하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원래 기차역이던 이 미술관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명작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강현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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