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세로 열아홉 줄 위, 삶이라는 돌 [비장의 무비]

김세윤 2025. 4. 9.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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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들어왔으니까 어떻게든 버텨봐라. 여긴 버티는 게 이기는 데야.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完生)으로 나아간다는 거니까. 넌 잘 모르겠지만 바둑에 이런 말이 있어. 미생. 완생.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드라마 〈미생〉에서 허둥대는 신입 사원 장그래에게 오 과장이 해준 이야기.

그때 오 과장은 잘 몰랐겠지만, 바둑에 대해서라면 장그래가 훨씬 더 많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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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감독: 김형주
출연: 이병헌, 유아인

“이왕 들어왔으니까 어떻게든 버텨봐라. 여긴 버티는 게 이기는 데야.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完生)으로 나아간다는 거니까. 넌 잘 모르겠지만 바둑에 이런 말이 있어. 미생. 완생.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드라마 〈미생〉에서 허둥대는 신입 사원 장그래에게 오 과장이 해준 이야기. 그때 오 과장은 잘 몰랐겠지만, 바둑에 대해서라면 장그래가 훨씬 더 많이 안다.

프로바둑 기사의 꿈을 접고 직장 생활을 시작한 장그래였다. 아닐 미(未), 날 생(生), 그래서 미생(未生). 바둑 용어로 ‘아직 살아 있지 않은 돌’은 완전히 죽은 돌도 아니라서 ‘완생’의 기회가 남아 있다는 걸 그가 모를 리 없다. 실수를 복기하고 꼼수를 경계하며 정석대로 돌파해야 한다. 바둑에서 배운 묘수 덕분에 현실에서 패착을 면한다. 사활을 건 승부수로 새로운 국면이 펼쳐진다.

미생, 완생, 실수, 복기, 꼼수, 정석, 묘수, 패착, 사활, 승부수, 국면···. 이 모든 단어는 바둑 용어다. 바둑을 가까이한 적 없는데도 이렇게 바둑은 늘 가까이에 있다. 바둑의 규칙도 모르면서 바둑의 은유를 품은 이야기엔 또 매번 솔깃하다. 가로세로 각 열아홉 줄이 만들어낸 삼백예순한 개의 교차점, 그 위에 번갈아 놓는 검은 돌과 흰 돌의 승부가 장그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 삶에도 어떤 가르침을 주리라 믿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보게 된 영화 〈승부〉는 조훈현(이병헌)이 세계 프로바둑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완생’의 국수(國手)로 등극한 그가 어린 바둑 신동 이창호(김강훈)를 만난다. 제자로 삼는다. 집에 데려와 같이 먹고 자며 바둑을 가르친다. 기재(奇才)를 타고났지만 정석을 따르지 않는 고집 센 천재. ‘미생’의 청년 이창호(유아인)는 스승을 따라 하는 대신 차근차근 자신만의 바둑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조훈현을 넘어선다.

여기까지는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 영화의 진짜 매력은 나를 앞질러 간 제자의 등을 보고 가야 하는 스승의 마음을 복기하는 데 있다. ‘남을 이기는 승부’가 ‘자신을 이기는 승부’로 바뀌어가는 삶의 포석(布石)을 풀이한다.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내리막에서 오히려 더 힘껏 내달려 그렇게 붙은 가속으로 기어이 다음 오르막을 타고 넘는, 짜릿한 반격의 행마(行馬)를 그려낸다.

이미 충분히 드라마틱한 실화의 힘을 믿고 굳이 무리수를 두지 않은 각본으로 1승. 이병헌과 유아인은 물론이고 조연들까지 제 몫을 확실히 해낸 배우들 덕분에 2승. 신파에 기대지 않고 이야기를 끝내야 할 타이밍에 멋지게 끝낼 줄 아는 연출의 힘으로 3승. 오랜만에 기분 좋은 한국 상업영화를 만나고 오는 길, 나는 드라마 〈미생〉에서 장그래가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래 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조치훈 9단이 하신 말씀이에요. 바둑 한 판 이기고 지는 거, 그래 봤자 세상에 아무런 영향 없는 바둑. 하지만 세상과 상관없이 나에겐 전부인, 그래도 바둑.” 그에게 사람들이 물었단다. “왜 이렇게 처절하게, 치열하게 바둑을 두십니까? 바둑일 뿐인데.” 조치훈 9단이 대답했다. “그래도 바둑이니까. 내 바둑이니까.”

그래 봤자 영화이지만, 그래도 영화일 수밖에 없다. 내 이야기니까. 내게 허락된 세상이니까.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반집’의 미학을 그려낸 이 영화에서 나는 결국, ‘이기는 승부’와 ‘지지 않는 승부’의 차이를 배우고야 말 테니까.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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