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사는 세상] 강렬하게 때론 우아하게…편견, 손끝으로 맞서다

황지원 기자 2025. 4. 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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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사는 세상] (1) 여성 지휘 개척자 김경희 청주시향 예술감독
꿈 이루겠단 일념으로 독일로 유학
무대 위 실력과 패기로 선입견 극복
유수 오케스트라 지휘·인재 양성 등
청주시향 이끌며 클래식 매력 전파
국내 최초 여성 지휘자 김경희 청주시향 예술감독은 “지휘봉을 들고 포디움(지휘대) 위에 설 때면 천하를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말한다.

선택의 연속인 인생. 남들이 가지 않는 길에 오르는 건 쉽지 않다. ‘이들이 사는 세상’은 그 어려운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들’의 이야기는 또 다른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건넬 것이다.

충북 청주 시민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인 청주예술의전당. 이곳 깊숙이 위치한 오케스트라 합주실에서 청주시립교향악단 단원들이 지휘자를 따라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때로는 우아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지휘봉을 흔들며 90여명의 연주를 하나의 음악으로 완성하는 사람. 국내 최초 여성 지휘자인 김경희 청주시향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만났다.

“뚜둥 뚜둥 뚜둥. 여기는 좀더 경쾌하게. 알겠죠?”

섬세하면서도 다정한 말투로 지시하는 김 감독은 ‘지휘자는 권위적이고 예민하다’라는 선입견을 부순다. 그러나 ‘지휘자는 열정적이다’라는 또 다른 선입견은 그 앞에서 더욱 단단해진다. 연습임에도 음악에 완전히 몰입한 눈빛과 표정, 몸짓을 보면 그가 올해 66세라는 사실이 쉽게 와닿지 않는다.

김 감독이 처음 지휘자를 꿈꾼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TV에서 본 베를린 필하모닉의 전설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모습에 반해 지휘자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선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공부하며 유학을 준비해나갔다. 숙명여자대학교 작곡과 졸업 후 드디어 독일 베를린예술대학교 지휘과로 유학을 떠난다.

“입학시험을 봤던 때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요. 지휘, 피아노, 오페라, 성악, 스코어 리딩(여러 악기의 악보를 동시에 보고 읽어내는 것), 면접까지 정신없이 이어졌죠. 한 교수가 ‘나는 여자가 지휘하는 게 싫다, 왜 너를 받아줘야 하냐?’고 물었어요. 저는 ‘지휘는 사람이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거다, 여성이 다른 악기는 모두 연주하는데 지휘를 못할 이유가 없다’고 답했죠. 당찬 태도가 오히려 교수에게 좋게 보였던 것 같아요.”

그렇게 김 감독은 학교 최초 동양인 여학생이 됐다. 베를린필하모닉의 연주를 직접 보러 갔을 땐 펑펑 울기도 했다. 하지만 유학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방학 때 해외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음악캠프를 떠나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그는 독일 공장에 가서 일했다. 학기가 시작되고 멈췄던 지휘 공부를 다시 할 땐 남들보다 두세배로 노력해야 했다. 여자가 지휘자가 되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얕보는 한인 유학생들도 견뎌냈다.

“아르바이트로 번 첫 월급을 어머니께 드렸어요. 어머니는 눈물 젖은 편지를 보내셨죠. 아르바이트나 공부의 고됨도, 남들의 시선도 저를 흔들진 못했습니다. 지휘자라는 분명한 꿈이 있었으니까요.”

1988년 귀국한 김 감독은 1989년 대전시향 초청으로 지휘자 데뷔 무대에 오른다. 포디움(지휘대)에 서니 천하를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더란다. 여자 지휘자를 무시하는 건 그때도 여전했다. 그는 무대 위에서는 실력과 패기로, 아래에서는 여유와 온기로 차가운 눈길을 잠재웠다. 여성의 지휘, 남성의 지휘에 차이가 있냐는 질문에 그는 오히려 반문했다.

“다른 점이 있나요? 예전에는 ‘여자가 정말 지휘를 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았어요. 요즘엔 지휘자협회에 가도 절반이 여자예요. 그 사람이 지휘를 할 수 있다 없다가 존재할 뿐 지휘에서 남녀의 차이는 없죠.”

1991년엔 모교인 숙명여대 교수로 부임해 2024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신은혜 수원시향 부지휘자 등 여러 여성 지휘자를 길러냈다. 2012년 숙명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펼친 공연은 지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학생을 가르치면서도 국내외 유수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과천시향·전주시향 상임지휘자를 맡았다.

청주시향 합주실에서 만난 김 감독. 90여명의 연주를 하나의 음악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2023년 11월부턴 청주시향을 이끌기 시작했다. 청주시향은 국내 최대 클래식 음악 축제인 ‘2025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에 초청받아 9일 무대에 오른다. 본 공연 전 청주에서 열린 사전 공연은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김 감독은 서울보다 클래식 공연을 접하기 어려운 청주시민들에게 오케스트라의 매력을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이번에 쇼스타코비치의 곡을 골랐어요. 관객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비화성(화음에 속하지 않는 음이 등장해 곡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었죠. 클래식과 친해지고 싶다면 같은 곡을 반복해 들어보세요.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릴 겁니다. 조금 더 익숙해졌다면 그다음은 공연장으로 가야죠. 현장에서 직접 듣는 음악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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