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냉전 체스 판의 '폰'이기를 거부한 체스 챔프

최윤필 2025. 4. 8.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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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으로 체스를 시작해 생계를 위해 체스 판에 매달린 그는 15세에 역대 최연소 소비에트 체스마스터 타이틀을 따냈고, 18세에 역대 최연소 FIDE 지정 프로 최정상 등급인 그랜드마스터가 됐다.

그는 14세에 전미 체스챔피언이 됐고 15세에 스파스키의 종전 기록을 깨고 역대 최연소 그랜드마스터가 됐으며, 16세에 고교를 중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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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V. 스파스키(Boris V. Spassky, 1937.1.30~2025.2.27)
보리스 스파스키는 1972년 월드 체스 챔피언전에서 도전자인 미국인 체스 천재 보비 피셔를 상대한 구소련 체스 그랜드마스터다. 세계인이 지켜본 그 세기의 대결에서 그는 챔프 타이틀을 잃었지만, 미국-소련 냉전 체스 판의 '폰'이 되기를 거부하며 스포츠맨십과 성숙한 매너로 구소련 체스 선수에 대한 서구인의 편견을 허물었다. 그는 이념과 조국보다 체스를 사랑한 진정한 체스 챔프였다. 프랑스로 망명한 뒤인 1983년 10월의 스파스키. 위키피디아

레닌은 체스 마니아였다. 혁명 전쟁(내전) 와중에도 틈만 나면 체스로 머리를 식혔고, 대중 연설에서도 체스 용어로 혁명의 당위를 웅변하곤 했다. 1908년 막심 고리키의 망명지 이탈리아 카프리섬에서 고리키가 지켜보는 가운데 동지이자 정적인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와 체스를 두었고, 0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히틀러와도 체스를 둔 정황이 히틀러의 미술 선생이던 유대계 체코 작가 엠마 뢰벤슈트램(Emma Löwenstramm)의 동판화로 확인되기도 했다.

혁명 후 레닌은 부르주아 여가문화의 잔재로 여겨지던 체스를 소비에트 국민 오락으로, 사회주의 교육-문화 수단으로 활용했다. 담대한 전략과 정교한 전술, 논리와 이성의 체스 메커니즘은 정교회의 영적 영향력을 누르기 위한 인민 개조의 혁명 종교였다. 레닌-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학교 체스 교육을 의무화하고 지역 단위별 체스클럽을 조직화해 뛰어난 인재를 발굴 육성했고, 그들을 사회주의형 인간의 지적 우월성을 선전하는 대서방 이데올로기-문화전쟁의 전위로 활용했다. 1940년대 냉전기부터 소비에트 해체 후인 2000년대 초까지 구소련-러시아가 체스로 서방 세계를 압도한 배경에 이른바 ‘체스 머신’ 즉, 소비에트 체스학교(시스템)가 있었다.

1948~2000년, 구소련-러시아가 국제체스연맹(FIDE)의 ‘월드챔피언’ 타이틀을 빼앗긴 건 단 한 번, 소련 챔피언 보리스 스파스키가 미국의 체스 천재 보비 피셔(Bobby Fischer, 1943~2008)에게 패배한 1972년 대회가 유일하다. 그 ‘세기의 대결’로 피셔는 일약 미국의 영웅이자 자본주의의 영웅이 됐고, 스파스키는 ‘조국의 수치’로 전락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스파스키도 피셔도 결코 체제형 인간이 아니었다. 스파스키는 공산당 입당을 거부한 러시아 구체제 민족주의자로서 75년 프랑스로 망명했고, 골수 반유대 인종주의자였던 피셔는 “유대인의 음모에 놀아나는 미국과 유엔”을 비난하며 조국을 등졌다. 요컨대 둘은 20세기 냉전 체스 판의 ‘폰’이 되기를 거부한 작은 거스러미였다.
하지만, 사뭇 다른 이념과 성향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를 체스의 맞수로 여기며 평생 우정을 나눴다. “챔피언으로 지낸 시절이야말로 내 생애 최악의 나날”이었다던 보리스 스파스키가 별세했다. 향년 88세.

1956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월드 체스 챔피언 도전자 토너먼트에 출전한 19세의 스파스키. 독학으로 체스를 익혀 뒤늦게 '소비에트 체스 머신'에 합류한 그는 한 해 전인 55년 역대 최연소로 국제체스연맹 '그랜드 마스터'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의 최연소 기록은 3년 뒤인 58년 만 15세의 보비 피셔에 의해 깨졌다. 위키피디아

1972년 스파스키-피셔 대결은 미국 작가 월터 테비스의 소설 ‘퀸스 갬빗(The Queen’s Gambit)’과 동명의 넷플릭스 드라마의 모티브가 됐지만, 주인공 ‘베스 하먼’의 캐릭터는 사실 둘의 개성과 극적인 인생사를 짜깁기한 거였다.

보리스 바실리예비치 스파스키(Boris V. Spassky, 1937.1.30~2025.2.27)는 1937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에서 건설노동자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의 둘째로 태어났다. 2차대전 나치의 레닌그라드 포위 공격이 한창이던 42년 피란길 열차 안에서 체스를 처음 구경한 5세의 스파스키는 키이우의 고아원에서 글보다 먼저 체스의 룰을 익혔다. 46년 여름 귀향하던 무렵 부모가 이혼하면서 어머니와 살게 된 그는 틈만 나면 공원 정자 주변에 모여 체스를 두던 어른들 틈에 끼여 어깨너머로 기량을 연마했다. 그는 “매일 오전 11시면 공원에 가서 체스를 구경하다 밤 11시에야 돌아오곤 했다. 9월이 돼 정자가 폐쇄되면, 그래서 체스 구경을 못하게 되면 죽을 지경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스파스키는 북한 평양학생소년궁전의 원형인 구소련 청소년 엘리트 문화체육교육기관인 ‘레닌그라드 개척자궁전(Palace of Pioneers)’에 47년 입학, 비로소 체계적인 체스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소비에트 체스의 아버지’라 불리는 월드챔피언 미하일 보트비니크와의 동시 체스(1대 다수의 경기)에 출전 도전자 24명 중 유일하게 승리한 게 47년 그해였다. 그 승리로 ‘체스 신동’ 스파스키는 소비에트 최연소 1등급 체스 플레이어가 됐고, 소비에트 체스 보조금을 받게 됐다. 그 보조금이 가족의 주된 소득원이었다.

독학으로 체스를 시작해 생계를 위해 체스 판에 매달린 그는 15세에 역대 최연소 소비에트 체스마스터 타이틀을 따냈고, 18세에 역대 최연소 FIDE 지정 프로 최정상 등급인 그랜드마스터가 됐다. 그리고 19세 때인 56년 지역 예선을 거쳐 월드챔피언 도전자 선발 토너먼트에 출전한다. 당시 챔피언이 48년부터 왕좌를 지켜온 만 45세의 보트비니크였다.

집단 연구와 훈련을 통해 전술-전략을 공유하던 소비에트 체스맨들의 스타일은 대체로 공격적이었다. 반면 스파스키는 공수 모두에 능했고 상대의 스타일에 따라 자유자재로, 때로는 변칙적이고 창의적인 수로 상대를 궁지에 모는 스타일로 유명했다. 게임의 전략적 포석을 까는 오프닝 게임에서, 무모하리만치 공격적이어서 정상급 경기에선 보기 드물다는 ‘킹스 갬빗’으로 게임을 시작해 훗날의 적수인 피셔와 75년 월드챔프 카르포프(Karpov) 등을 상대로 통산 16승을 거두었고, 60년 러시아 챔피언 결정전에서 ‘루크’를 희생시키는 대담한 수로 우크라이나 출신 소비에트 그랜드마스터 데이비드 브론스타인을 꺾기도 했다. 그 수는 63년 ‘007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의 한 장면으로 재연되면서 더 유명해졌다.
그는 2차례 챔피언전 도전 끝에 69년 소비에트 챔프 티그랜 페트로시안을 꺾고 제10대 월드챔피언이 됐다. 3년 뒤 그의 첫 방어전 상대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체스 선수'라는 전설의 주인공 피셔였다.

1971년 11월 'LIFE'지 표지의 보비 피셔. 그는 그해 월드챔피언 도전자 토너먼트에서 내로라하는 러시아 그랜드 마스터들을 잇달아 제압하며 정상급 선수로선 전무후무한 대기록인 20연승으로 도전자 타이틀을 획득했다. ebay.com

보비 피셔는 독일계 물리학자 아버지와 스위스 출신 유대인 교사 어머니의 아들로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 역시 2세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어머니와 함께 브루클린 빈민가에서 성장했다. 6세 생일 선물로 받은 체스 판과 교본을 통해 독학으로 체스를 익혔고, 10대 시절 브루클린 체스클럽에서 살다시피 해서 어머니와 불화하기도 했다. 그는 14세에 전미 체스챔피언이 됐고 15세에 스파스키의 종전 기록을 깨고 역대 최연소 그랜드마스터가 됐으며, 16세에 고교를 중퇴했다. 한 번 본 기보는 암기할 정도로 명석하면서도 암기형 천재들을 경멸할 만큼 창의적이었다는 피셔는 58년과 62년 두 차례 월드챔피언 도전자 토너먼트에서 낙마한 뒤 70~71년 토너먼트에서 소비에트 역대 챔프들을, 그것도 강적 마크 타이마노프(Mark Taimanov)와 벤트 라르센(Bent Larsen)을 6-0으로 완파하며, 정상급 선수로선 전무후무한 대기록인 20연승으로 도전자 타이틀을 획득했다.

체스 대결에서 줄곧 소련에 짓눌렸던 미국도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65~70년 5차례 전적에서 스파스키가 압도적으로 우위(3승 2무승부)였지만, 피셔의 파죽지세에 소련 역시 긴장했다. 소련 문화체육부는 연방의 모든 그랜드마스터들과 심리학자까지 총동원, 8개월간 전략-전술을 공동 연구하며 스파스키의 타이틀 방어에 매달리게 했다. 72년 대회는 미소 우주경쟁과 거의 맞먹는 냉전의 빅이벤트로, 전 세계 5,000만여 명이 중계방송을 시청하는 유례없는 흥행 속에 치러졌다.
피셔는 기량 못지않게 ‘천재적인 괴팍스러움’으로 유명했다. 대회 직전, 그는 우승 상금이 적다며 챔피언전 보이콧을 선언했다. 주최(후원자) 측은 부득이 상금을 두 배(25만 달러)로 인상했다. 67년 미국 첫 슈퍼볼 우승팀 선수 1인당 상금이 1만5,000달러였고, 69년 스파스키의 우승 상금은 고작 1,400달러였다. 당시 미 국무장관 핸리 키신저의 전화까지 받고서야 피셔는 대회지인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로 향했고, 그 바람에 대회는 예정보다 이틀 늦게 시작됐다. 6주간 24게임을 치러 먼저 12.5점(승점 1점, 무승부 0.5점)을 획득하면 이기는 경기였다.

1972년 세기의 대결 당시의 스파스키(위 사진 왼쪽)와 피셔. 아래 사진은 20년 뒤인 92년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리턴 매치 당시의 스파스키(왼쪽)와 피셔. AP, AFP 연합뉴스

첫 게임에도 30분 늦게 대회장에 나타난 피셔는 무승부가 가능한 판에서 무모한 승부수를 던졌다가 패했다. 두 번째 게임은 온갖 트집을 잡으며 경기를 거부하다가 몰수패 당했다. 방송 카메라 소음 때문에 집중이 안 되니 모두 철수시켜라, 공식 상금 외에 입장료 수입도 분배해달라 등등이 그의 요구였다. 세 번째 경기는 본대회장 한편의 작은 룸에서, 고정 영상카메라 한 대만 두고 치러졌다. 그 경기부터 피셔는 승승장구하며 21게임 만에 7승 3패 11무승부(12.5점)로 스파스키를 꺾고 전무후무 미국 유일의 체스 월드챔피언이 됐다.
스파스키는 9만 달러라는 거액의 상금(1972년 소비에트 1인 GDP 7,200달러)을 받았지만, 조국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는 오명을 감당해야 했다. 미국-서방의 영웅이 된 피셔는 닉슨의 백악관 만찬에 초청받았고, 미국 전역의 마트에선 체스 용품 품귀현상이 빚어졌다. 체스 사교육이라는 새로운 시장까지 생겨났다.

사실 72년 피셔의 억지스러운 요구 대부분은 스파스키(소련)가 동의해야 수용될 수 있는 거였다. 즉 그가 동의하지 않아 피셔가 경기를 마다하면 스파스키는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는 셈이었다. 당연히 소련 정부는 그의 부동의를 한사코 종용(명령)했고, 그는 피셔의 모든 요구를 묵묵히 수용했다. 두 번째 게임을 앞두고 당시 소련 문화체육상 파블로비치(Sergey Pavlovich)는 스파스키에게 전화를 걸어 30분가량 설득했다. 모든 요구를 거부하고 최후통첩을 보내라는 장관의 요구를 그는 거부했다. 통화 후 스파스키는 후환이 두려워 3시간 넘게 침대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고 훗날 고백했다. 그런 끝에 패배한 거였다.

앞서 소련 정부는 71년 토너먼트에서 피셔에게 완패한 타이마노프에게 지급하던 모든 보조금을 끊고 해외 출국을 금지시킴으로써 사실상 그를 퇴출시켰다. 스파스키도 1960년 레닌그라드 세계 학생 체스 챔피언십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러 미국 선수에게 단 29수 만에 패한 뒤 2년간 해외 원정경기 출전을 금지당한 바 있었다. ‘월드 체스 명예의 전당’은 스파스키의 72년 고집이 "명예의 문제"였다고 평했다. “그는 월드 챔피언으로서, 전 세계 체스 팬들에게 챔피언의 경기를 보여줄 의무가 있다고 여겼다.

스파스키는 73년 러시아 챔피언전에서 또 한 번 우승함으로써 부활했다. 2차례 결혼-이혼한 상태였던 그는 75년 당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 차르 백군 장성의 딸인 당시 주모스크바 프랑스 대사관 직원 마리나 슈체르바초바(Marina Y. Shcherbachova)와 재혼했으며, 이듬해 처가 방문을 핑계로 프랑스로 출국했다가 망명했다. 그는 프랑스 대표 체스 선수로 활동하며 국가 대항전과 개인전 등에 출전했지만 예년 같은 기량은 보이지 못했다. 현역 은퇴 후엔 체스 해설가 등으로 활동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중압감에 시달리던 피셔는 72년 말 무렵부터 돌연 칩거하기 시작했다. 인터뷰는 물론이고 고액 로열티의 국제 초청 대회도 일절 거부했다. 모계 절반의 유대인인 그가 히틀러 저서를 탐독하며 반미-반유대주의 발언을 일삼고 미국을 적대시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구체적인 계기는 알려진 바 없지만,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철학자 오토 바이닝거의 병적인 반유대주의처럼, 극단적인 완벽주의와 자기부정이 동족혐오로 확장되는 예는 드물지 않다. 그는 FIDE의 경기 규칙 개정 등을 요구하며 75년 월드챔피언 도전전마저 거부하다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했고, 이후 체스계에서도 사라졌다.
피셔가 공개적으로 체스를 둔 건 72년 대회 20년 뒤인 92년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스파스키와의 리턴 매치가 유일하다. 당시는 세르비아가 유고연방 탈퇴-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등과의 전쟁(내전), 엄밀히 말하면 세르비아계에 의한 ‘인종청소’가 한창이었고, 미국과 유엔이 강력한 경제제재로 세르비아를 옥죄던 때였다.
국제 여론을 무마하려는 의도였던지, 세르비아의 한 은행가가 500만 달러 상금을 걸고 둘의 재대결을 주선했다. 피셔는 부시 행정부의 국제긴급경제권한법(IEEPA)을 조롱하듯, 20년의 은둔을 접고 그 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10승 5패 15무승부로 스파스키를 다시 꺾었다. 하지만 둘은 72년 때와는 사뭇 다르게 시종 화기애애하게 담소하며 그 대회를 즐겼고, 각각 335만 달러와 165만 달러 상금을 받았다. IEEPA 첫 위반 사례로 연방대배심에 기소된 피셔는 이후 망명자로서 헝가리와 필리핀, 스위스, 아이슬란드 등지를 떠돌며, 현지 방송 인터뷰 등 기회만 있으면 유대인과 “유대인의 꼭두각시인 미국정부”를 성토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필리핀 한 방송 토크쇼에 출연해서는 “환상적인 소식”이라며 “(테러) 군대가 미국을 장악한 뒤 모든 유대교 회당을 폐쇄하고 유대인들을 체포해 수십만 명의 주동자들을 격리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피셔는 2004년 만료된 여권으로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태국으로 출국하려다 체포돼 미국으로 송환될 처지가 됐다. FIDE와 세계적인 체스 스타들, 필리핀 국왕 등이 구명운동을 벌였고, 스파스키도 부시에게 공개 서한을 보냈다. “보비와 나는 공범이다. (···) 나도 처벌해라. 나를 체포해서 그와 한 감방에 가두고, 우리에게 체스 세트를 달라.” 피셔는 억류 9개월 만에 풀려나 떠돌이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평생 독신이었다.

“나는 체스 판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
우리의 체스 왕국에는 국경이 없다”

보리스 스파스키, 2022년 WCHOF 인터뷰에서

체스 냉전은, 악마로 알던 상대 진영 선수도 인간이란 사실을 느끼게 해준 냉전 균열의 무대이기도 했다. “내가 싫어하는 상대와 마주 앉으면 경기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나는 상대와 좋은 관계이길 원한다”던 스파스키였다. 그는 72년 대결에서 패했지만, 피셔와 대비되는 신사적인 매너와 교양 있는 태도로 미국과 서방 체스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6번째 게임의 결정적 패배 직후 공개 복기장에 이례적으로 참석해 피셔의 기량에 찬사를 보냈고, 최종 패배 후 기자회견에서도 “피셔는 예술가이자 금세기의 보기 드문 인간”이라고 극찬했다.
새 챔피언 피셔는 경기 직후 스파스키에게 우정의 편지와 함께 카메라를 선물했다. 알려진 바 둘은 평생 편지와 전화 통화로 서로의 안부를 챙겼다. 2008년 1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피셔가 별세하자 스파스키는 “내 형제가 떠났다”며 애도했다.

스파스키는 전처들과 1녀 1남을 두었고, 세 번째 아내인 슈체르바체프와도 아들 하나를 낳았다. 201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내도록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던 그는 2012년 돌연 석연찮은 이유로 러시아로 돌아갔고 거기서 생을 마쳤다. FIDE 회장 아르카디 드보르코비치(Arkady Dvorkovich)는 “스파스키는 소비에트와 세계의 가장 위대한 체스 선수 중 한 명인 동시에 진정한 신사였다”고 애도했다. 그는 2003년 세계 체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2022년 '세계 체스 명예의 전당' 인터뷰에서 진정한 조국이 어디냐는 질문에 “나는 체스 판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 우리의 체스 왕국에는 국경이 없다”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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