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빈·설경구의 소름 돋는 연기도 어쩌지 못한 빈약한 서사('하이퍼나이프')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피카레스크. 즉 선악 대결이 아니라 악당들이 등장해 치고 받는 서사는 이제 우리에게도 익숙해졌다. 권선징악 구도의 식상함에, 악이어야 비로소 악을 이길 수 있다는 현실 인식까지 더해져 피카레스크가 주는 짜릿함은 우리네 대중들도 중독시켰다.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하이퍼나이프>는 바로 그 피카레스크 서사를 가진 작품이다. 주인공이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살인자이니 말이다.
뇌수술에 거의 미쳐있는 정세옥(박은빈)이 그 주인공이다. 17세의 나이에 의대 수석 입학할 정도의 천재지만 자신이 그토록 따르던 스승 최덕희(설경구) 교수에 의해 의사면허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뇌수술을 하지 않으면 못견딜 정도로 수술에 집착하는 이 인물은 합법적인 테두리에서 수술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을 불법 수술해주며 살아간다. 수술을 할 때 사는 맛을 느끼지만 수술을 방해하는 존재가 나타나면 서슴없이 죽이는 사이코패스다.

의사라면 응당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해야하는 게 맞지만 이 의사는 사람을 죽이는데도 아무런 죄의식이 없다. 그래서 손에 든 메스는 '활인'의 도구이면서도 동시에 '살인'의 도구가 되는 인물이다. 물론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의사로서의 의무나 윤리의식보다 그저 완벽한 뇌수술을 하는 것 자체에 매료된 세옥은 뛰어난 의술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의사라고 부르긴 어려운 존재다.
<하이퍼나이프>는 이 문제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워놓고 그가 벌이는 일련의 파행적인 수술과 살인을 사건으로 그리면서, 그의 이런 점들을 낱낱이 알고 있는 스승 최덕희를 그 대결구도로 세워놓는다. 최덕희는 전 세계가 알아주는 뇌수술 전문의지만 정세옥과 똑닮은 인물이다. 그 역시 뇌수술에 미쳐있고 그래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정세옥을 제자로 키워내는 그 시간을 가장 행복한 나날들로 기억한다.

하지만 정세옥의 의사면허를 취소시켜 불법 수술을 전전하게 만든 최덕희는 뇌에 생긴 종양 때문에 정세옥을 찾아다니는 입장이 된다. 뇌종양을 제거해주는 대가로 여러 혜택들을 제안하지만 정세옥은 이를 거부하고, 그럼에도 최덕희는 끈질기게 그녀를 따라다니며 그녀가 처한 위기 상황들을 제거하는 일도 해준다. 정세옥과 최덕희의 관계는 이처럼 서로 으르렁대는 관계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닮아 서로를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끈끈한 사제지간이기도 하다. 이 애매모호한 관계 속에서 사건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피카레스크 서사가 그러하듯이 치열한 악당들의 예상하기 어려운 행동들이 야기하는 부딪침이 극의 재미를 끌고 가지만 아쉬운 건 이러한 극적 대결구도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주제의식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사의 방향성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세옥과 덕희의 대결은 마치 게임처럼 치고받을 뿐, 어떤 의미있는 전개처럼 느껴지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마지막회까지 봐야 이 작품이 피가 철철 흐르는 대결구도를 통해 진짜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드러날 수도 있지만, 이제 겨우 2회를 남긴 현 시점에서 보면 장르적 묘미 이외에 마음을 잡아끄는 극의 문제의식이 잘 보이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빈구석을 채워주는 설경구과 박은빈의 연기다.
설경구가 선인지 악인지 구분되지 않는 인물을 통해 따뜻한 스승과 살벌한 살인자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연기를 보여준다면, 박은빈은 지금껏 그의 필모에서 보지 못했던 살벌한 사이코패스 연기를 통해 그 변신 자체가 주는 짜릿함을 선사한다. 이 미친 연기력이 시청자들의 멱살을 쥐고 작품을 끝까지 보게 만들지만, 그 끝에 이르러 스토리의 허망함이 허탈감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우려되는 면이 있다. 모쪼록 남은 2회에서 이러한 우려를 날려 버리는 서사의 반전을 보여주기를.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gmail.com
[사진=디즈니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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