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피프틴’ 만들어낸 K팝의 ‘야망’ [플랫]
몇달 전 일본의 한 대형 음반사에서 해외 마케팅 업무를 하는 인스타그램 친구를 만났다. 다이렉트메시지(DM)로만 연락하다 처음 본 사이였지만, 음악이라는 교집합과 챗GPT가 있으니 소통에 어려움은 없었다. 주된 화제는 ‘왜 K팝은 흥하고, J팝은 명성을 잃었는가’였다. 그는 J팝은 내수 시장이 크기 때문에 해외로 진출할 동기와 야망이 부족한 게 원인이라고 했다. 야망.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나이에 맞지 않은 성숙한 차림과 실력으로 공연하던 앳된 참가자들이 떠올랐다.

<언더피프틴> 방송 편성이 무산됐다. 15세 이하 여자 아동·청소년 출연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최연소 참가자는 8세였다. ‘오디션 방송 주 참가자는 고등학생 연령 아이돌 지망생’이라는 공식을 깨서 성공한 <내일은 미스트롯>과 <내일은 미스터트롯>을 만든 서혜진 크레아스튜디오 대표가 제작의 키를 쥐었다. 성 상품화 논란을 빚은 티저 이미지에는 이번에도 차별화된 방송을 만들겠다는 의도가 드러난다. 아이돌 오디션 세계관의 표준인 교복과 학교, 화사한 파스텔톤 색감과는 정반대 콘셉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지 속 참가자들은 아무도 환하게 웃지 않는다. 노출을 힙(Hip)함으로 포장하는 성숙한 올 블랙 패션, 대비되는 강렬한 붉은 배경까지 더해져 ‘어리지만 마냥 어리지만은 않은’ 매력을 꾸며낸다. 대중이 ‘15세 이하’에게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아동이 아동답지 못한 사회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방영 취소 여론이 거세지자 제작진은 기자회견을 열어 참가자들이 충분한 보호와 보살핌을 받았다고 변명했다. 보호자와 상의해 스타일링을 결정했다고 했지만, K팝 산업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는 미성년자 아이돌 지망생은 동의와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녹화 주간 연습을 최대 35시간으로 제한했다고 했지만, 개인 연습 시간까지 셈했는지는 의문이 든다. 공연의 완성도를 위해 연습실에서 보내는 시간은 통상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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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이하’들의 오디션 방송 출연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MBC <방과 후 설렘>, SBS <K팝스타>, 엠넷 <프로듀스101> 등 수많은 프로그램에 꾸준히 출연했다. 아이돌이 촉망받는 직업이 되며 K팝 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틱톡에는 댄스 신동이 넘쳐난다. 수많은 아이돌이 초등학생 때 연습생 생활을 시작해 15세 이전에 데뷔한다. 너무 빨리 어른의 세계에서 살게 된 이들이 정신 건강 문제로 활동을 잠정 중단하는 일은 이제 익숙하다. 계약교섭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기획사가 생살여탈권을 쥔 전속계약을 맺어 발생하는 분쟁은 K팝의 일부가 됐다. <언더피프틴>은 K팝의 야망이 아동·청소년을 도구화하는 전방위적인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어 더 큰 논란을 일으켰다.
현재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의 용역 제공 시간을 근로기준법에 맞춰 축소하고, 연령별로 세분화하는 내용의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일부개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는 입법 취지의 타당성은 인정하지만, 구체적인 기준 수립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검토 의견을 내는 등 비교적 진취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한국음악콘텐츠협회·한국매니지먼트연합 등 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들은 반대 성명을 내고 아이돌의 근로자성을 부인하고 있다. 보수적인 제도권의 변화, <언더피프틴> 편성 취소를 이끈 대중의 감수성을 업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K팝의 야망은 분명 더 멀고, 넓은 시장을 개척하는 21세기판 ‘한강의 기적’을 이끌었지만, 타협할 수 없는 많은 것의 훼손을 정당화했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K팝이 달려온 길을 돌아봐야 할 때다
▼ 최이삭 K팝 칼럼니스트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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