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있어? 이런 아빠 있어? 아이유의 짜증 빙자한 자랑에 공감 백배('폭싹속았수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2025. 4. 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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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박해준 같은 가난한 아빠가 최고의 판타지일까(‘폭싹속았수다’)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아빠의 겨울에 내가 녹음이 되었다. 그들의 푸름을 다 먹고 내가 나무가 되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금명(아이유)이 결혼식장에 아빠 관식(박해준)의 손을 잡고 들어갈 때 그런 내레이션이 흐른다. 그 내레이션은 금명의 목소리지만, 작가의 목소리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자식들의 목소리가 된다. 그 누가 부모의 겨울을 먹지 않고 자라지 않았던가. 그들의 청춘을 다 먹으면서 나무로 자라 녹음이 되지 않았던가.

<폭싹 속았수다>의 관식은 지금껏 우리가 드라마에서 봐왔던 그 어떤 남성보다 강렬한 판타지를 준다. 돈 많은 재벌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난 성공을 거둔 입지전적인 인물도 아니다. 대단한 모험가도 아니고 그래서 전 세계를 마음껏 항해하던 그런 사람도 아니다. 그는 그저... 아버지이자 남편이다. 너무나 가난하지만 그런 가난한 자신에게 다가온 애순(아이유, 문소리)이라는 세상과, 그 세상 사이에서 갖게 된 금명, 은명, 동명이라는 더 큰 세상을 품은 남편이자 아버지. 이 존재는 어째서 이리도 강렬한 판타지를 줄까.

젊어서는 무쇠였다. 하지만 그 무쇠라는 표현은 그러기를 바라거나 그랬으면 하는 이들의 바람이 만든 것이었을 뿐, 세월과 함께 닳아간다. 삐걱거린다. 하지만 무쇠를 바라는 가족들 앞에 그는 계속 무쇠처럼 거기 그 자리를 지키려 했다. 아내를 더할 나위 없이 귀하게 여겼고, 딸에게는 언제든 "아빠 여깄어"라며 힘들면 "빠꾸"하라고 허세를 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딨냐고 하지만, 사실 그런 사람은 없어도 그런 아빠이자 남편들을 쌔고 쌨다. 우리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았을 뿐.

"결혼하잘 때 내가 육지, 대학, 시인 중에 하나는 꼭 해주기로 했는데, 하나를 못 해 주고 가나 했더니, 그래도 요새는 뭘 쓰기는 써. 그것만 보면 나는 좋아 죽겠지. 엄마가 원래로는 백일장 장원 출신인데. 여고 1등 출신인데. 엄마가 그렇게 근사한 사람이야. 말도 못하게 아까운 사람이야. 잘 해줘. 잘 부탁해."

죽어가면서 관식은 딸 금명에게 그렇게 엄마를 맡긴다. 자기 등골을 다 빼서 무쇠가 닳아버릴 때까지 다 쓰고 가면서도 말도 못하게 아까운 아내에게 해준 게 없어서 회한이 남은 남편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딸에게도 미안해한다. 늘 빠꾸하라며 허세를 부렸지만, 관식은 금명이가 통통배로 낚은 고래처럼 기쁜 존재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딸에게는 그냥 미안하지만 엄마 생각하면 죽을 정도로 미안하다며 딸에게 엄마를 부탁한다. 다정해 달라고.

딸은 늘 그런 아빠가 짜증났다. 금명의 입에는 "아빠 짜증나"라는 말이 붙었다. 지나는 길에 들렀다며 천안에서 서울까지 딸 찾아와 무작정 기다리던 아빠가 짜증났고, 결혼식장에서 딸 보내면서도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며 아빠가 늘 뒤에 있다고 하는 그 말에 짜증났다. 그리고 떠나는 마당에 엄마 걱정하는 아빠가 짜증난다. 다정해달라는 그 말에 금명은 깨닫는다. 자신에게 아빠가 얼마나 다정했던가를. 그런 아빠에게 자신이 얼마나 다정하지 못했던가를.

사실 '짜증'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건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금명의 엄마의 엄마인 광례(염혜란)가 요망진 딸 애순(김태연)에게 느꼈던 '웬수'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했던 그 마음이 담긴 것일게다. "나 아부지 엄마는 빚잔치에, 첫 서방은 병수발, 새 서방은 한량에 내 팔자가 지게꾼이라 지게꾼. 전부 다 내 지게 위에만 올라타는데, 이 콩만한 게 자꾸 내 지게에서 내려와 자꾸 지가 내 등짐을 같이 들겠대. 그러니 웬수지. 내 속을 제일 후벼파니 웬수지." 웬수라고 말하지만 그건 사랑이었던 것처럼, 짜증이라 말하지만 그것 역시 사랑이었을 게다.

광례가 그 힘겹던 한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던 건 그 '웬수' 때문이었다. 가진 것 하나 없지만 그는 세상을 다 가졌다. "넌 있어? 요런 딸내미 있어? 어떻게 요런 게 나한테 걸려." 이렇게 자랑하고 싶은 세상 모든 것이 그 웬수였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금명이 '짜증'이라고 말했지만 그것도 짜증을 빙자해 하는 자랑이 아닐까. 넌 있어? 이런 아빠 있어? 이렇게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이건 우리 마음 속에 저마다 갖고 있는 웬수와 짜증을 떠올리게 한다. 세월이 흘러 짜증을 부렸던 그들도 이제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 "넌 있어?"라고 자랑하는 때는 어김없이 온다. 대단한 욕망을 성취하지 않아도 한 가족을 건사하는 일이 세상 모두를 가진 것처럼 대단한 일이고, 그저 한 삶을 살아낸 것만으로도 저 바다를 건너 모험을 떠나는 것보다 더 큰 모험이라고 말하는 <폭싹 속았수다>는 그래서 너무나 현실적인 판타지다. 어쩌면 눈여겨보지 않았을 뿐, 누구에게나 다 있었던 판타지.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gmail.com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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