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번 바라보고 가까스로 한 획… 아름답고도 무서운, 자연에 닿다
프랑스·제주 등서 지내며 영감
바다·산·계곡 ‘자연의色’ 탐미
“더 그릴수 있을까 고뇌 사라져
내일도 내년도 당연히 그릴 것”
“매일 보는 계곡도 십수 년을 못 그리기도 해요. 준비가 돼야 그리죠. 자연은 아름답지만 무서워요. 수천 번을 보고 나서야 가까스로 붓을 듭니다.”
지난 27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만난 강명희(78) 작가는 자연을 주제로 삼아온 자신의 작업 세계를 이렇게 정리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남편 임세택 화백과 함께 1970년대 프랑스로 이주했던 강 작가는 1986년 한국 여성 작가 최초로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전시를 개최하며 국내외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번에 그의 60여 년 화업을 조망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어 주목된다.
최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강명희-방문’전은 1960년대 초기작을 비롯해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존재와 자연의 관계를 풀어낸 대형 회화, 귀국 후 정착한 제주의 풍광을 담은 추상까지 수십 년 활동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125점을 선보인다. 이날 강 작가는 “고등학교 봄 소풍 때 무리에서 빠져나와 그린 뒷동산부터 프랑스 시기, 제주에서의 근작까지 한꺼번에 보여드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의미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전시는 세 파트로 나뉜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 머물고, 그래서 오래 눈에 담은 서광동리가 한 자리를 점했다. 근작들로 구성된 ‘서광동리에 살면서’에선 한라산, 황우치 해안, 산방산, 안덕계곡 등 제주의 특정 지역에서 비롯된 그림들이 전시됐다. 사실적 풍경화는 아니지만, ‘제주의 색’을 모조리 흡수한 캔버스를 응시하고 있으면, 매일 정직하게 제 할 일을 하는 제주의 산과 바다, 돌과 나무가 어느새 아른거린다. 강 작가는 “제주의 자연에선 24시간을 꽉 차게 쓰게 된다. 살아있다는 느낌이다”고 했다.
강 작가의 제주 작업실은 귤 창고, 옛 마을회관, 바닷가 앞 등 여러 군데에 마련돼 있다. 그날그날 마음이 일렁이는 곳으로 간다. 그러다 보니, 동시에 여러 작업을 하게 된다. 그는 “많을 땐 30개를 한꺼번에 펼쳐놓는다”며 웃었다. “옮겨 다니는 게 도움이 되기도 해요. 어느 순간 그림들이 서로 만나거든요.”
프랑스 생활과 해외 각지에서 포착한 풍광은 두 번째 파트 ‘방문’에서 만날 수 있다. 작가는 1990년대부터 사용한 프랑스 투렌의 작업실에서 정원과 땅을 소재로 ‘북원’ ‘중정’ ‘방문’ 시리즈를 완성했다. 그중 8년에 걸쳐 작업한 높이 5m에 달하는 대작 ‘북원’은 미술관 정중앙 벽에 걸려 있다. 이 그림에 열중하던 시기 작가는 “지문이 닳을 정도로” 정원과 밭을 갈고 정리했다. 낫을 들었다 붓을 들었다 했다. ‘죽어버린 엉겅퀴’들에서 출발한 그림은 자연과 소통하며 생명의 근원을 함축해 내는 강 작가의 작품 세계를 잘 드러낸다.
강 작가가 아름다우면서도 ‘무서운’ 자연을 보다 진지하게, 수행하듯 마주하고 그리기 시작한 건 퐁피두 전시 이후다. 30대의 작가는 프랑스 예술계에 발을 디뎠고, 거장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며 “충일하고 충만한” 매일을 보냈다. “나이도 나라도 동서양도 장르도 중요하지 않았어요. 오로지 예술로만 통했죠.” 하지만 일상의 충일함이 그림 작업의 충분함을 보장하진 않았다. 답답했던 작가는 홀로 멀리 여행을 떠났다. 몽골의 고비사막, 남미 파타고니아, 남극, 인도, 홍콩, 중국, 대만…. “세상을 잡아먹을 것 같은 자연의 힘이 두려워졌어요. 내가 배운 지식을 모두 버리고 다시 시작하자고 결심했죠.” 이후 가장 뚜렷한 변화는 캔버스의 크기다. 돌아오자마자 높이 7m에 달하는 작품 ‘비원’에 돌입했다. 다만, 이번 전시엔 출품되지 못했다.
프랑스 이주 직후 그렸던 회화들도 눈길을 끈다. 구상적 성격이 짙으며, 때로 삶과 현실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기도 한다. ‘개발도상국’ 시리즈는 당시 한국의 상황과 맞물려 있는데 그중 ‘교수형’은 인혁당 사건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작가가 초나라 굴원의 장편 서사시 ‘이소’를 즐겨 필사한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황제에게 바른말을 해 귀양을 떠난 굴원이 정치적 좌절, 인간적 고뇌 등을 토해내듯 쓴 시다. “하지 말라고 안 하고, 하라면 하고. 그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시인이나 화가의 인생이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작가는 요즘 자꾸 자연과 그림에서 ‘엄격함’을 본다고 했다. 그릴수록 새로운 문이 열리고 숙제가 많아진다. 그렇지만 ‘과연 더 그릴 수 있을까’ 하던 젊은 날의 고뇌는 사라졌다고 했다. “내일도, 내년에도 당연히 그릴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엄격함을 감내할 연륜이라면 그런 것이겠죠. 서울 오기 직전 제주에서 매화가 지는 걸 보고 왔는데, 얼른 가서 그리고 싶어요.(웃음)” 전시는 6월 8일까지, 무료.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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