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국가 지정, 한·미 동맹 균열인가 해프닝인가
미국 에너지부(DOE)에서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한 이유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원인도, 다음 달 발효 이후 여파도 불확실한 가운데 정치권에서 제기되어온 핵무장론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3월10일, 〈한겨레〉 등 언론 보도를 통해 미국 에너지부가 동맹국인 한국을 ‘민감국가 및 기타 지정국가 목록(SCL)’에 포함한 사실이 보도된 이후 외교부가 원인 파악에 나섰다. 에너지부는 미국 내 에너지 및 핵안보 정책을 주관하는 정부 부처로 핵무기 관련 정책을 수행한다. 민감국가 지정은 조 바이든 행정부 때인 올해 1월 이루어졌는데 외교부가 두 달이 지나도록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 ‘둔감 외교’라는 질책이 이어졌다. 미국 에너지부는 국가안보, 핵 비확산, 미국 경제 안보 위협, 해당국 역내 불안정, 테러 지원 등을 이유로 민감국가 리스트를 작성해왔으며 지난해까지 25개국을 지정하고 관리해왔다. 민감국가로 지정될 경우 미국과 원자력 및 인공지능(AI) 같은 첨단기술 정보를 공유하는 데 제한이 생기며, 에너지부 소속 시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특별 승인이 필요하다. 다만 한국은 민감국가군 가운데 안보 위험 최하위 그룹인 ‘기타 지정국’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 경우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되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외교부가 민감국가 지정 원인을 기자단을 통해 밝힌 것은 3월17일 저녁이다. 최초 언론 보도 이후 일주일가량 지난 뒤였다. 외교부 공식 입장에 따르면 민감국가 지정은 보안 사고에 따른 조치다. 외교부는 해당 사건이 무엇인지 함구하고 있다. 다만 미국 에너지부가 2024년 국회에 제출한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10월부터 2024년 3월 사이에 에너지부 산하 아이다호 국립연구소 직원이 특허 정보에 해당하는 원자로 설계 소프트웨어를 한국으로 가져가려다 적발된 적이 있다. 이 사건이 외교부가 설명한 보안 사고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치권과 외교·과학기술 전문가들은 이 사건 하나만으로 특정 국가를 ‘통째로’ 민감국가로 지정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의구심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의 민감국가 지정은 안보협정을 맺고 있는 동맹국 한국에 큰 충격을 던졌다. 민감국가로 지정된 나라들의 면면 때문에 이번 조치의 의미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민감국가 리스트에는 북한·이란·시리아 같은 미국의 적성국가를 비롯해 중국·러시아·인도·이스라엘 같은 핵보유(추정)국 등이 올라 있다. 예컨대 인도의 경우 미국의 중요한 안보 파트너국이지만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은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중국을 경계하기 위해 인도가 동참한 안보 협의체 ‘쿼드(Quad)’ 를 발족하며 지정학적 협력관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핵기술 및 에너지 관련 민감 기술을 다루는 에너지부로서는 인도를 주의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강력한 안보 협력을 맺고 있는 국가이지만 NPT 미가입국이자 실질적 핵무장 국가로 간주된다. 타이완의 경우는 역내 불안정성이 원인이 된 사례다. 타이완은 중국과 긴장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핵기술이 고도화된 적대 국가가 있는 경우 국가안보와 관련된 핵기술 및 기타 고위험 에너지 기술 전파를 제한할 필요성이 생긴다.
저자세 외교는 경계해야 하지만···
한국은 최근 몇 년 사이 대북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헌법에 한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으로 명기하도록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전술핵 보유 능력도 키워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월20일 취임 첫날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이라고 지칭하며 지난 1기 김정은 위원장을 로켓맨으로 비하하던 때와 다른 태도를 보였다.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핵보유국이라고 언급한 것은 전례 없는 일로, 북한 비핵화를 전제로 해온 대북 전략의 변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간 한국에서 제기되어온 핵무장론이 국내 정치용 구호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도 이 점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것과 북한의 핵기술이 고도화되는 징후가 맞물리면서 주요 외교 매체에서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 및 필요성이 공식적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미국의 외교 전문 격월간지 〈포린어페어〉 1·2월호에 ‘한국이 핵무장을 해야 하는 이유(Why South Korea should go Nuclear)’라는 논문이 실렸다. 미국인 정치학자 로버트 켈리 부산대 교수와 김민형 경희대 교수가 작성한 해당 논문은 트럼프 취임으로 미국의 핵억지력이 한계에 노출될 것이며, 북한의 핵 위협이 확대됨에 따라 한국 역시 독자적인 핵억지력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미국 역시 전략적 이유로 동맹국들의 핵기술 보유를 용인해왔듯이 한국의 자강을 위한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올해 1월 오스트레일리아 로위 연구소(Lowy Institute)에서도 ‘트럼프 임기 중 한국이 핵무장을 할 가능성이 있는 이유(Why South Korea might go nuclear in Trump’s term)’를 짚었으며, 미국 보수 성향 싱크탱크인 카토 연구소(Cato Institute)에서도 ‘한국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핵무기를 원하는 이유(Why South Korea Wants Nuclear Weapons Now More Than Ever)’라는 글을 통해 한국의 핵기술 보유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런 흐름을 미국이 포착하지 않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봉근 국립외교원 명예교수는 한국이 민감국가로 지정된 상황을 “마일리지가 차곡차곡 누적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미국과 워싱턴 선언을 한 직후 윤석열 대통령은 하버드 대학 연설에서 ‘(한국이) 1년 안에 핵무장을 할 수 있는 기술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을 비롯해 조태열 외교부 장관과 유력 정치인, 과학계 인사들도 핵무장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대외적인 사인을 계속 보냈다. 한국은 한·미 원자력협정에 따라 핵연료재처리 기술도 통제받고 있는데 단시간 안에 핵기술을 갖출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니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사정을 주시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전봉근 교수는 현 정부에 대한 안보 경계가 높아지던 와중에 아이다호 연구소에서 발생한 보안 사고가 추가됐을 뿐이라고 봤다.
아이다호 국립연구소와의 공동연구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한 원자력 공학자 역시 〈시사IN〉과 통화하면서 ‘보안 사고만으로 민감국가로 지정되기는 어렵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보안 사고가 문제라면 그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를 해고하거나 업체를 처벌하면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특허 정보라 해도 아이다호 연구소의 원자로 설계 기술 자체가 한국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의아하다고도 했다. 대형 원전을 계속해서 만들어왔던 한국의 원자로 설계 기술은 미국과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고 오히려 앞서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민감국가 지정 조치에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라면서도 한국의 파이로프로세싱(사용 후 핵연료재처리) 기술 연구가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과 아이다호 연구소의 공동연구 중 주목할 것은 파이로 프로세싱이다. 10여 년간 연구를 진행해왔고 현재 1단계 연구가 막바지다. 그런데 이 기술은 순수 플루토늄을 채취할 수 있어 미국으로서는 독약, 우리로서는 (핵기술 보유를 위한) 보약이 될 수도 있다. 해당 기술은 미국에 있는 핵연료를 통해 2단계 연구를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이번 조치로 미국 측은 한국의 원전 기술을 견제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됐다.”
4월15일 민감국가 지정 조치 발효를 앞두고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에게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을 직접 만나 해당 문제를 협의하라고 지시했다. 민감국가 지정 해제가 단기간에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 속에서 안덕근 장관이 3월20일 미국을 방문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4월2일 상호 관세 명단을 내놓겠다고 한 시점과 맞물리는 만큼 조심스러운 협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성과를 위해 민감국가 지정 해제를 무리하게 밀어붙이다 관세 조치 등 더 큰 외교 사안에서 한국이 불리한 국면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미 동맹과 핵무장, 함께 못 간다
이번 사안에 대한 저자세 외교를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3월18일 조셉 윤 주한 미국 대사대리는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특별간담회에서 민감국가 지정에 대한 과도한 정치적 해석을 경계했다. 박원곤 동아시아연구원 북한연구센터 소장(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역시 이러한 관점에 동의한다. “예를 들어 테러지원국을 생각해보자. 미국은 대외적으로 확실하게 불이익을 줄 때는 구체적인 사유와 기준을 전 세계에 공개적으로 밝히고 의미를 짚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런 것이 전혀 없었다.” 박 교수는 핵무장론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초반의 짐작과 달리 현재는 미국 에너지부 내부 규정으로 한정해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바이든 정부하의 결정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핵 비확산을 위한 워싱턴 선언과 캠프 데이비드 선언은 바이든 행정부의 대외정책 중 매우 큰 업적이다. 그런데 한국이 핵기술을 보유하려 한다는 전제로 대외적 불이익을 준다면 자신들의 성과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된다. 부처와 산하 연구소의 보안 강화를 위한 지침일 수 있지만 동맹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라고 보는 것은 과도하다.” 박원곤 교수는 미국 에너지부에서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했던 과거 사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당시에도 민감국가 지정에 따른 불이익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88년과 1996년 미국 회계감사원(GAO)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과거 두 차례 민감국가로 지정된 바 있다. 1차는 1986년 1월부터 1987년 9월까지 약 1년 9개월, 2차는 1993년 1월부터 1994년 7월까지 약 1년 7개월 동안 이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한국과 미국의 관계다. 1차 민감국가 지정 기간이던 1987년 5월, 한국과 미국은 ‘한·미 과학기술협력협정’을 연장하고 ‘한·미 군사비밀보호에 관한 안보협정’을 체결했다. 2차 민감국가로 지정된 시기 전후에도 한·미 간 과학기술 협력 수준은 높았다. 민감국가 지정 전이던 1991년, 한국은 북한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으며 1992년에는 한·미 특허비밀보호협정과 1988년 만료된 한·미 과학기술협력협정을 재체결했다. 민감국가로 지정된 기간이었던 1993년 12월에는 제1차 한·미 과학기술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과학기술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 두 달 전이던 1993년 10월, 김시중 과학기술처 장관이 1991년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재고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해 논란을 일으켰다. 국정감사에서 김 장관은 핵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서는 핵연료재처리 시설을 보유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김영삼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집권당인 민자당 역시 평화적 이용을 위한 핵연료재처리 시설 보유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한국이 민감국가로 지정되었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이 같은 내부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제1차 한·미 과기공동위원회에서 미국 측에 민감국가 지정 해제를 건의했고 미국이 이를 수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민감국가 지정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여전히 미지수인 가운데 명확히 확인된 것도 있다. 핵기술을 개발하자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외교적 압박을 감당할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핵무장 혹은 핵잠재력 보유를 추진한다는 것은 민감국가 지정에 따른 외교적 부담과는 차원이 다른 정치적 압력과 견제에 놓이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트럼프 정부는 한국의 핵무장에 그 어떤 행정부보다 관대한 입장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정책차관을 통해 트럼프 행정부의 시각을 추측할 수 있다. 콜비 정책차관은 트럼프 집권 1기 때 국방부 부차관보로 지내며 대중국 강경노선을 주도해온 인물이다. 그는 중국 견제에 미국의 모든 자원을 집중하고 한국·일본·타이완 등과 군사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이 나라들이 스스로 방위능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한 미군 역할 조정과 한국의 자체 핵무장 필요성 등을 주장한다. 한국과 미국이 북핵 위협에 한 몸처럼 대응하는 것을 목표로 한 한·미 간 핵협의그룹(NCG) 운영을 비롯해 핵우산 강화 약속은 트럼프 정부에서 필연적으로 약해지리라 보인다. 그만큼 국내에서도 핵기술 보유에 대한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핵잠재력 보유에 대한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민감국가 지정 이후 “미국 에너지부가 나섰다는 것은 (핵문제에 대한) 초보적인 논의조차 지켜보고 있다는 뜻(박선원 의원)”이라며 입장을 우회했다. 외교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민감국가 지정에도 벌벌 떨면서 핵무장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핵무장 가능성을 시사할수록 대외적 견제와 압박이 커지고 외교 협상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핵무장을 하겠다면 북한처럼 고립되는 것까지 감당할 것인지, 아니면 미국이 원하는 대로 중국을 배제하는 외교 노선을 선물로 쥐여주면서 미국을 설득할 것인지 초당적 논의를 통해 전략을 짜야 한다. 이 과정은 국민을 설득하고 대외 위협을 극단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중차대한 일인데 핵무장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과연 그럴 준비가 되어 있나?” 그는 핵보유 가능성을 시사해 긴장감을 높일수록 핵연료재처리 기술처럼 긴요한 산업용 기술을 개발할 길도 막힌다고 덧붙였다.
민감국가 지정은 많은 불확실성을 제기하고 있지만, 그 와중에 한 가지는 명확하게 확인시켜준다. 한·미 동맹과 핵무장은 함께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김다은 기자 midnightblu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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