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 이병헌 "바둑돌 내려놓는 순간의 울림이 숙제였죠"[인터뷰]

[스포츠한국 신영선 기자]
배우 이병헌은 영화 '승부'에 출연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 바둑이라는 소재의 특별함보다는 그 안에 숨겨진 인물 간의 드라마를 꼽았다. 바둑을 전혀 알지 못했던 그는 조훈현과 이창호, 이 두 실존 인물의 삶 자체가 그 어떤 허구의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특히 이들의 사제 관계는 90년대 바둑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대중에게도 이미 잘 알려진 스토리였다.
'승부'는 어린 천재 이창호를 직접 거둬 제 손으로 키워낸 바둑 레전드 조훈현이 제자와의 대결에서 패한 후 타고난 승부사 기질로 다시 한번 정상에 도전하는 내용을 담았다. 영화는 주연인 유아인의 마약 투약 논란을 겪으며 크랭크인 시점으로부터 4년간 개봉이 미뤄지는 우여곡절을 겪었기도 했다. 김형주 감독은 개봉이 미뤄지던 것에 대해 "지옥 같은 터널에 갇혀있는 느낌"이라며 영화 속 대사를 빗댄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영화에서 조훈현 역을 맡은 이병헌은 바둑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연출을 맡은 김형주 감독도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승부'는 연출과 서사, 연기력에 크게 의존해야 했던 작품이었다. 더구나 바둑은 승패에 따른 감정 표현이 극히 적은 스포츠이기에 이병헌은 얼굴 표정과 몸짓만으로 감정을 전달해야 했고, 연기적으로 상당히 도전적인 작품이었다. 이병헌은 바로 그 점에서 오히려 매력을 느꼈다. 그는 프로 바둑 기사를 연기하면서 바둑 자체를 배우기보다 몸짓과 행동의 디테일에 집중했다. 지난 21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스포츠한국과 만난 이병헌은 "조훈현 국수가 '프로다운 손 모양으로 바둑돌을 놔달라'는 농담 섞인 연기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고 밝혔다.

"바둑돌을 들었을 때 느꼈을 긴장과 환희, 혹은 절망감이 내면에서는 엄청난 감정들로 소용돌이를 치고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다 정적이잖아요. 그런 가운데서 미세한 감정 표현이나 떨림 같은 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했어요. 바둑을 배우지 않은 건 연기를 하는 데 실력은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바둑기사들을 보면 바둑판에 딱 가져다 붙이는, 마치 양면테이프가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돌을 두잖아요. 그런 프로다운 손놀림에 대한 훈련을 했어요. 돌 하나를 놓는 그 순간의 울림이 얼마나 조훈현 국수처럼 보이고 느껴지느냐가 저에게는 숙제였죠. 기본적으로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부분에서는 자유로움이 많지 않아요. 그런데 또 어떤 측면에서 보면 기댈 곳이 많기도 하거든요. 겉모습부터 버릇, 생각까지 직접 보고 듣고 옮기면 되니까요. 반면 픽션의 성격을 띤 캐릭터는 작가가 의도한 바를 잘 살려서 연기해야 하니까 자유로움이 있죠.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번 작품은 제한된 부분도 있었지만 자료가 워낙 많아서 연기를 하는데 참고를 많이 했어요. '남산의 부장들' 연기를 떠올려 보면 비슷하게 실화를 바탕으로 연기했지만 어떤 감정이었을까 상상을 했을 때 정확한 답이 없어서 고민이 되는 지점이 있었죠."
이병헌은 조훈현 국수가 "대단한 명연기였다"고 극찬할 정도로 그의 캐릭터를 완벽히 재현해냈다. 2대8 가르마는 물론 줄담배를 피우며 다리를 떠는 습관부터, 제자 이창호 국수와의 대국에서 누워서 바둑을 둔 이른바 '와기' 장면까지 섬세하게 표현해냈다.
"남기철 9단(조우진 분)이 조훈현 국수와 바둑을 둘 때 경기에서 지고 나가며 '참 매너도 없이'라는 대사를 해요. 거기에 '니가 매너 이야기할 입장이냐'라고 대꾸를 하거든요. 사실 조훈현 국수의 매너에 대해 말이 많기도 했고 또 그런 부분에서 유명하신 걸로 알아요. 자세를 옆으로 앉거나 또 양반 다리를 하고, 와기로 거의 누워서도 경기를 하기도 하고요. 바둑에서 말하는 어떤 매너나 예의 같은 것들에 대해서 아주 파격적인 분이시죠. 이기고 있을 때 다리를 떠는 것도 어쩌면 심리전이 아닐까 생각이 들 만큼 독특한 자세를 취하시는데 재미있는 포인트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부분을 연기에서 많이 보여주려고 했죠."

영화 '승부'의 시나리오에는 가슴에 와 닿는 명대사가 많다. "좋은 바둑은 한 명의 천재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평정심을 잃는 순간 바둑은 거기서 끝이야", "견디다가 이기는 거요. 그렇게 참다 보면 한 번쯤은 기회가 오거든" 모두 영화에 등장하는 말이다. 이병헌은 실제 지인들에게도 명대사가 많았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해 "그분들이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승부 속에서 여러 일들을 겪은 뒤 한 말이기 때문에 명언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며 "정말 좋은 영화"라고 자평했다.
"조훈현 국수와 이창호 국수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가장 큰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이창호 국수는 한집에 살면서 아들처럼 키우던 제자이잖아요. 야단도 치고 직접 가르치기도 하고. 같은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또 같이 결승까지 함께 가요. 대국을 하러 가는 차 안에서는 묘한 공기가 감돌고 단 1%도 생각지 못한 패배를 맞았을 때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껴요. 그리고 다시 집에 함께 돌아와서는 적막한 분위기가 생겨요. 조훈현 국수의 아내 입장을 들여다보면 아들처럼 키운 아들이 저쪽 방에 틀어박혀 경기를 복기하고 남편은 거실에 앉아 담배만 피우고 있어요. 그런 묘한 감정들이 이 영화의 가장 핵심이 되는 정서가 아닐까요. 저나 다른 배우들 역시 바로 그 정서를 연기하고 싶어서 이 작품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승부'는 바둑으로 승부한다는 다소 경직될 수 있는 소재 안에서도 피식피식 웃게 되는 말맛 유머가 극에 감칠맛을 더하는 작품이다. 시사회 도중 관객석에서 터지는 예상외의 폭소에 이병헌은 그가 출연했던 14년 전 흥행작 '번지 점프를 하다'를 떠올렸다.
"영화에서 유머러스한 장면이라고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요. 진지하게 영화에 임했고, 연기도 그렇게 했는데 시사회 날 반응에는 저도 놀라고 당황스러웠어요. '번지 점프를 하다'를 찍었을 때 느꼈던 감정하고 비슷했죠. 저는 그 영화도 굉장히 진지한 영화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시사회를 보러 온 기자들이 심각한 장면에서 막 웃더라고요. 망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큰일이 났다' 싶었죠. 당시 매니저에게 화장실에 있을 테니 사람들이 나가면 데리러 오라고 하고는 몇십 분을 숨어있었어요. 어떡하나 싶어 걱정을 하고 있는데 매니저가 '이상해' 그러더라고요. 그 친구도 절망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이 '야 이거 너무 재미있지 않냐'라고 하는 걸 몇 번이나 들었다고 하는 거예요. 나중에 보니 영화에 확 몰입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던 상황인 것 같았어요. 저는 웃기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연기를 했는데 웃음 포인트가 많은 걸 보면 관객들이 감정 이입을 크게 했구나 싶었어요. 이번 영화 시사회도 관객석에서 웃음이 나와 좋았죠."
스포츠한국 신영선 기자 eyoree@sportshank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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