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모나리자’, 묘한 표정 속에 담긴 비밀은 [슬기로운 미술여행]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5. 3. 29. 22:2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미술여행 - 16] 베를린, 국립 회화관

런던에 봄 날씨가 찾아왔습니다. 나무는 여전히 황량하지만 공원의 꽃들이 먼저 피면서 영국인들이 열광적으로 봄을 즐기는 모습을 신기하게 구경하는 중입니다. 저는 아직 겨울 여행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중이지만 온화해진 날씨는 반갑습니다. 오늘은 서베를린의 미술관을 만나보겠습니다.

서베를린의 예술성지, 문화 포럼
문화 포럼의 국립 회화관. 도서관과 미술관이 복합 건물 안에 자리잡고 있다. ⓒ김슬기
베를린이 동서로 나뉘어 있던 냉전 시기에 서베를린을 대표하는 예술지구가 ‘베를린 문화포럼’입니다. 문화 포럼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부터입니다. 이 지구의 청사진을 그린 것은 현대 건축의 거장 한스 샤룬(Hans Scharoun)과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였습니다.

서독 정부는 박물관섬을 보유한 동베를린과의 문화 격차를 줄이기 위해 서베를린 지역에 야심 찬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세계 최고의 음악 도시를 만들겠다는 포부에서 탄생한 필하모니의 콘서트홀, 베를린 필하모니(Berliner Philharmonie)의 건축이었죠.

멀리서도 눈에 띄는 오각형의 텐트처럼 생긴 2200석의 음악홀은 황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최고의 음향을 위해 빈야드(Vineyard) 구조로 설계되어 내부는 무척 복잡한 구조였고, 구석구석 카라얀과 푸르트벵글러의 동상 등이 숨어있는 음악 박물관 같았습니다. 세계 최고 교향악단의 반세기가 넘는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많은 기록과 흔적들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날짜가 우연히 맞아서 젊은 여성 지휘자 달리아 스타세브스카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라벨의 <바다>와 그리그의 피아노 콘체르토를 들었는데요. 기계처럼 정교한 단원들의 호흡과 우아한 표현력까지 대단했습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천상의 하모니였습니다.

문화 포럼은 분단 전 베를린의 곳곳에 소장 중이던 예술작품 중 서베를린 지역에 남아있던 것을 모아서 박물관을 만들고, 차례차례 문화 시설을 완성해나갔습니다. 5개의 미술관과 필하모니 극장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가장 사랑받는 미술관은 게맬데갈레리(Gemäldegalerie), 즉 베를린 국립 회화관입니다.

국립 컬렉션이 차곡차곡 모은 회화들은 1998년부터 이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하인츠 힐머와 크리스토프 새틀러(Hilmer & Sattler)가 건축한, 프로이센의 전통적 양식을 접목한 모던한 외관의 건물은 화려함보다는 실용성에 집중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2킬로미터의 아트 로드, 국립 회화관
독일 최고의 렘브란트 컬렉션을 자랑하는 국립 회화관. ©Gemäldegalerie
국립회화관은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 미술의 거장들을 망라해 전시하는 미술관입니다. 고전 미술 컬렉션으로는 뮌헨의 알테 피나코텍과 함께 독일을 대표하는 곳이죠. 연면적이 굉장히 커서 1층에 모든 전시 공간이 펼쳐져 있고, 방이 정말 많아서 전시 동선이 무려 2킬로미터에 달합니다. 저는 몇시간을 관람하고도 출구를 찾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얀 반 아이크, 피터 브뤼겔, 알브레히트 뒤러, 라파엘로, 티치아노의 걸작을 고루 품고 있습니다. 가장 인기 많은 작가는 역시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화가 렘브란트와 요하네스 베르메르, 이탈리아 거장 카라바조를 꼽을 수 있죠. 이곳은 독일에서 가장 방대한 렘브란트 컬렉션을 보유한 미술관입니다.

Sandro Botticelli [Venus], 1490 ©김슬기
그런데 가장 신기했던 컬렉션은 산드로 보티첼리였습니다. 피렌체 외에서는 잘 보기 힘든 보티첼리의 작품이 우치피 미술관 못지않게 많아 5점이나 걸려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가장 유명한 <비너스의 탄생>의 주인공인 비너스가 나 홀로 그려진 작품도 있다는 점입니다.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난 사랑의 여신이 홍합 껍데기 위에 서 있는 대신, 관객 앞에 직접적이고 홀로 서 있습니다.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는 보티첼리가 비너스의 여러 누드화를 그렸다고 기록했는데요. 토리노의 갤러리아 사바우다 (Galleria Sabauda)와 스위스의 개인 컬렉션이 다른 버전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베를린의 비너스의 완성도가 무척 빼어난 편이라고 합니다. 제 눈에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수백여점의 초상화로 가득한 이 엄숙한 미술관에서 유독 눈에 띄는 초상화가 있습니다. 얀 반 아이크와 함께 초상화라는 개념을 개척한 화가였던 로지에 반 데르 웨이덴 (Rogier van der Weyden)의 <젊은 여인의 초상>(1440)입니다. <모나리자>, <진주 귀고리 소녀>와 마찬가지로 모델이 누군지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유명한 여인이 그림 속에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당대에는 초상화는 마돈나처럼 경건한 시선을 그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여성의 시선은 관람객을 바라보려 정면으로 몸을 돌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초상화의 발명이었죠. 15세기 신학자이자 철학자 니콜라우스 폰 큐스가 “모든 것을 보는 신의 시선”과 같다고 극찬했던 작품입니다.

Rogier van der Weyden [Portrait of a Young Woman with a White Headdress], 1440 ©김슬기
큐피드의 발아래 놓인 것의 비밀
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Cupid as Winner], 1601/02 ©Gemäldegalerie
카라바조의 <큐피드의 승리>(1601/2)는 귀여운 그리스 신을 모델로 삼은 것과 달리 무척 도발적인 작품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기는 큰 크기에 놀랐습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빅토리>(피렌체 베키오 궁전)를 풍자한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죠. 장난기 넘치는 도발적인 포즈의 서민을 모델로 그린 큐피드(Amor)의 조롱하는 미소가 특징입니다.

이 그림에는 많은 상징이 숨어 있습니다. 인문학의 상징인 악기와 과학도구, 명성의 상징인 월계관, 전쟁의 상징인 갑옷 같은 큐피드의 전리품이 발아래 흩어져 있습니다. 큐피드가 승리의 상징인 V자로 벌린 다리 뒤에는 권력의 상징인 왕관도 보입니다. 큐피드는 별이 총총한 푸른 지구의에 앉아 있어서, 마치 온 세상을 이긴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이라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열망은 인류의 모든 세속적, 도덕적, 지적 가치를 정복할 수 있다는 은유가 그림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에서 사랑의 힘을 이렇게 묘사했죠.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Omnia vincit amor).”

Hans Holbein the Younger [The Ambassadors], 1533 ©The National Gallery
이 그림 속의 다양한 물건들은 내셔널 갤러리의 대표작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의 웅장한 초상화 <대사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16세기의 최고의 초상화가였던 그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대사 장 드 댕트빌과 친구 주교인 조르주 드 셀브를 사진보다도 더 세밀하게 묘사해 이 걸작을 완성했죠.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해골로 유명해진 그림이지만, 이 그림 속 물건들이 상징하는 의미도 많은 해석을 낳고 있습니다.

두 남자 사이에는 책과 악기, 지구의, 천구의 등 큐피드와 매우 흡사한 사물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수학과 과학, 예술 등에 대한 두 남자의 관심사를 폭넓게 그림 속에 드러내는 과시적인 작품인 셈입니다. 그런데 1세기 뒤의 천재 화가 카라바조는 이 지식의 상징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참하게 짓밟아 버립니다.

베르메르 맛집에서 만난 진주 목걸이 ‘귀부인’
Jan Vermeer van Delft [The Glass of Wine], 1658/60 ©Gemäldegalerie
Jan Vermeer van Delft [Young Lady with a Pearl Necklace], around 1660/65 ©Gemäldegalerie
전작을 모두 만나보려고 ‘도장깨기’를 하고 있는 요하네스 베르메르도 2점을 만났습니다. [The Glass of Wine]은 정물화처럼 치밀하게 계산한 실내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이었습니다. 와인잔을 든 아내의 표정을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의 남모를 사연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이죠.

<진주 목걸이를 한 젊은 여인>은 후기 베르메르의 화법적인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모델의 신분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진주 귀고리 소녀>와 대조적으로 귀부인처럼 보이는 여인이 그려졌습니다. 화려한 황금빛 옷을 입고 진주 목걸이를 들고 거울을 바라봅니다. 이 거울을 통해 우리는 화가의 주문대로 시선을 이동하게 됩니다.

오른쪽 전경의 의자에는 원래 류트와 같은 현악기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벽에는 여성상 뒤에 이미 거친 붓놀림으로 그려진 지도도 있었죠. 이는 덧칠로 그림에서 제거되었습니다. 베르메르의 많은 작품은 많은 사물로 회화적 구조가 빽빽하게 채워지고 불안했지만, 이 그림만은 많은 여백이 지배하게 된 이유죠.

덕분에 관람객의 여주인공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우리의 눈은 맞은편 거울로 향했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시 탁자 위의 커튼 위로, 왼손의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일종의 원을 그리며 움직이게 됩니다. 시선을 산만하게 하지 않는 빈 벽이 그림의 중앙에 있는 이유입니다. 덕분에 빛과 그림자가 가장 극적으로 대비되는 베르메르의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피난을 떠난 명작들
Emile Claus [Sunny day], 1895 © Odesa Museum of Western and Eastern Art
유럽에서 체감하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국에서와는 차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유럽 어디서나 반전 시위를 쉽게 볼 수 있고, 많은 유럽 정치인들은 이 전쟁과 관련한 정책을 국가의 최우선 순위로 삼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대륙의 이웃 나라가 겪는 비극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닐 테니까요.

국립 회화관에서는 우크라이나 미술 특별전 <From Odesa to Berlin>(1월 24일~6월 22일)를 열고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우크라이나 남부의 유명한 항구 도시인 오데사에 있는 서양 및 동부 미술관(Museum of Western and Eastern Art)의 그림 60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베를린으로 대피해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고, 이 전시를 통해 독일의 시민을 만날 수 있게 됐죠.

16~19세기 유럽 예술을 다채롭게 선보이는 이 전시는 안드레아스 아헨바흐, 프란체스코 그라나치, 프란스 할스, 베르나르도 스트로치, 알레산드로 마그나스코, 프리츠 타울로 등의 작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유럽 대형 미술관처럼 화려한 컬렉션은 아니지만 우크라이나 미술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전시였습니다.

전시의 마지막에서 제 눈을 사로잡은 작품은 에밀 클라우스(Emile Claus, 1849~1924)의 <2월 아침>입니다. 이 화가는 벨기에의 인상파라고 할 수 있는 루미니즘(Luminism)의 창시자로 불립니다. 어느 겨울의 아침, 소년과 소녀를 향해 쏟아지는 찬란한 빛을 탁월하게 묘사한 그림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소년, 소녀들에게도 화사한 빛처럼 평화가 다시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런던에 살면서 유럽 미술관 도장 깨기를 하고 있습니다. 매일경제신문 김슬기 기자가 유럽의 미술관과 갤러리, 아트페어, 비엔날레를 찾아가 미술 이야기를 매주 배달합니다. 뉴스레터 [슬기로운 미술여행]의 지난 이야기는 다음 주소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https://museumexpress.stibee.com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