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모나리자’, 묘한 표정 속에 담긴 비밀은 [슬기로운 미술여행]
[슬기로운 미술여행 - 16] 베를린, 국립 회화관
런던에 봄 날씨가 찾아왔습니다. 나무는 여전히 황량하지만 공원의 꽃들이 먼저 피면서 영국인들이 열광적으로 봄을 즐기는 모습을 신기하게 구경하는 중입니다. 저는 아직 겨울 여행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중이지만 온화해진 날씨는 반갑습니다. 오늘은 서베를린의 미술관을 만나보겠습니다.
서독 정부는 박물관섬을 보유한 동베를린과의 문화 격차를 줄이기 위해 서베를린 지역에 야심 찬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세계 최고의 음악 도시를 만들겠다는 포부에서 탄생한 필하모니의 콘서트홀, 베를린 필하모니(Berliner Philharmonie)의 건축이었죠.
멀리서도 눈에 띄는 오각형의 텐트처럼 생긴 2200석의 음악홀은 황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최고의 음향을 위해 빈야드(Vineyard) 구조로 설계되어 내부는 무척 복잡한 구조였고, 구석구석 카라얀과 푸르트벵글러의 동상 등이 숨어있는 음악 박물관 같았습니다. 세계 최고 교향악단의 반세기가 넘는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많은 기록과 흔적들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날짜가 우연히 맞아서 젊은 여성 지휘자 달리아 스타세브스카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라벨의 <바다>와 그리그의 피아노 콘체르토를 들었는데요. 기계처럼 정교한 단원들의 호흡과 우아한 표현력까지 대단했습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천상의 하모니였습니다.
문화 포럼은 분단 전 베를린의 곳곳에 소장 중이던 예술작품 중 서베를린 지역에 남아있던 것을 모아서 박물관을 만들고, 차례차례 문화 시설을 완성해나갔습니다. 5개의 미술관과 필하모니 극장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가장 사랑받는 미술관은 게맬데갈레리(Gemäldegalerie), 즉 베를린 국립 회화관입니다.
국립 컬렉션이 차곡차곡 모은 회화들은 1998년부터 이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하인츠 힐머와 크리스토프 새틀러(Hilmer & Sattler)가 건축한, 프로이센의 전통적 양식을 접목한 모던한 외관의 건물은 화려함보다는 실용성에 집중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얀 반 아이크, 피터 브뤼겔, 알브레히트 뒤러, 라파엘로, 티치아노의 걸작을 고루 품고 있습니다. 가장 인기 많은 작가는 역시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화가 렘브란트와 요하네스 베르메르, 이탈리아 거장 카라바조를 꼽을 수 있죠. 이곳은 독일에서 가장 방대한 렘브란트 컬렉션을 보유한 미술관입니다.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난 사랑의 여신이 홍합 껍데기 위에 서 있는 대신, 관객 앞에 직접적이고 홀로 서 있습니다.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는 보티첼리가 비너스의 여러 누드화를 그렸다고 기록했는데요. 토리노의 갤러리아 사바우다 (Galleria Sabauda)와 스위스의 개인 컬렉션이 다른 버전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베를린의 비너스의 완성도가 무척 빼어난 편이라고 합니다. 제 눈에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수백여점의 초상화로 가득한 이 엄숙한 미술관에서 유독 눈에 띄는 초상화가 있습니다. 얀 반 아이크와 함께 초상화라는 개념을 개척한 화가였던 로지에 반 데르 웨이덴 (Rogier van der Weyden)의 <젊은 여인의 초상>(1440)입니다. <모나리자>, <진주 귀고리 소녀>와 마찬가지로 모델이 누군지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유명한 여인이 그림 속에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당대에는 초상화는 마돈나처럼 경건한 시선을 그는 것이 전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여성의 시선은 관람객을 바라보려 정면으로 몸을 돌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초상화의 발명이었죠. 15세기 신학자이자 철학자 니콜라우스 폰 큐스가 “모든 것을 보는 신의 시선”과 같다고 극찬했던 작품입니다.
이 그림에는 많은 상징이 숨어 있습니다. 인문학의 상징인 악기와 과학도구, 명성의 상징인 월계관, 전쟁의 상징인 갑옷 같은 큐피드의 전리품이 발아래 흩어져 있습니다. 큐피드가 승리의 상징인 V자로 벌린 다리 뒤에는 권력의 상징인 왕관도 보입니다. 큐피드는 별이 총총한 푸른 지구의에 앉아 있어서, 마치 온 세상을 이긴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이라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열망은 인류의 모든 세속적, 도덕적, 지적 가치를 정복할 수 있다는 은유가 그림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에서 사랑의 힘을 이렇게 묘사했죠.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Omnia vincit amor).”
두 남자 사이에는 책과 악기, 지구의, 천구의 등 큐피드와 매우 흡사한 사물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수학과 과학, 예술 등에 대한 두 남자의 관심사를 폭넓게 그림 속에 드러내는 과시적인 작품인 셈입니다. 그런데 1세기 뒤의 천재 화가 카라바조는 이 지식의 상징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참하게 짓밟아 버립니다.
<진주 목걸이를 한 젊은 여인>은 후기 베르메르의 화법적인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모델의 신분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진주 귀고리 소녀>와 대조적으로 귀부인처럼 보이는 여인이 그려졌습니다. 화려한 황금빛 옷을 입고 진주 목걸이를 들고 거울을 바라봅니다. 이 거울을 통해 우리는 화가의 주문대로 시선을 이동하게 됩니다.
오른쪽 전경의 의자에는 원래 류트와 같은 현악기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벽에는 여성상 뒤에 이미 거친 붓놀림으로 그려진 지도도 있었죠. 이는 덧칠로 그림에서 제거되었습니다. 베르메르의 많은 작품은 많은 사물로 회화적 구조가 빽빽하게 채워지고 불안했지만, 이 그림만은 많은 여백이 지배하게 된 이유죠.
덕분에 관람객의 여주인공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우리의 눈은 맞은편 거울로 향했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로 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시 탁자 위의 커튼 위로, 왼손의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일종의 원을 그리며 움직이게 됩니다. 시선을 산만하게 하지 않는 빈 벽이 그림의 중앙에 있는 이유입니다. 덕분에 빛과 그림자가 가장 극적으로 대비되는 베르메르의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국립 회화관에서는 우크라이나 미술 특별전 <From Odesa to Berlin>(1월 24일~6월 22일)를 열고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우크라이나 남부의 유명한 항구 도시인 오데사에 있는 서양 및 동부 미술관(Museum of Western and Eastern Art)의 그림 60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베를린으로 대피해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고, 이 전시를 통해 독일의 시민을 만날 수 있게 됐죠.
16~19세기 유럽 예술을 다채롭게 선보이는 이 전시는 안드레아스 아헨바흐, 프란체스코 그라나치, 프란스 할스, 베르나르도 스트로치, 알레산드로 마그나스코, 프리츠 타울로 등의 작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유럽 대형 미술관처럼 화려한 컬렉션은 아니지만 우크라이나 미술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전시였습니다.
전시의 마지막에서 제 눈을 사로잡은 작품은 에밀 클라우스(Emile Claus, 1849~1924)의 <2월 아침>입니다. 이 화가는 벨기에의 인상파라고 할 수 있는 루미니즘(Luminism)의 창시자로 불립니다. 어느 겨울의 아침, 소년과 소녀를 향해 쏟아지는 찬란한 빛을 탁월하게 묘사한 그림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소년, 소녀들에게도 화사한 빛처럼 평화가 다시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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