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끌어안은 화가, 슬픔을 그리다”.. 고영우 개인전 ‘Layers of Fantasy: 환상에 대한 환상’
“지우고 덮고 다시 그린 시간들”.. 어둠 속에 피어난 인간의 형상

# 빛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둠을 통해 빛을 느꼈습니다.
그림은 그의 구원이자, 침묵의 언어였습니다.
세상의 외곽이 아닌, 자신의 심연을 끝없이 파고들었습니다.
크레파스의 긁힌 선, 유화의 묵직한 군상 속에서 작가는 끊임없이 묻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제주 서귀포 출신의 고영우 작가의 개인전 ‘Layers of Fantasy: 환상에 대한 환상’이 4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 제주돌문화공원 내 ‘갤러리 누보’에서 열립니다.
전시는 작가의 45년 작업 세계를 조망하는 대규모 회고전으로, 1970년대 실험적 크레파스 작업부터 최근 유화 인물 군상까지, 모두 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 존재의 풍경을 그린 사람
“슬픔은 인간이 지닌 원초적이고, 극히 아름다운 감정이다. 내 작품의 본질은 고립된 인간의 내적 고통”이라는 작가는, “슬픔, 상실, 불안. 나는 어두움과 눈물을 그리며, 인간의 선한 것을 찾는다”라고 자신이 평생 그려온 작품 세계를 설명합니다.
그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지 않습니다.
대신 한 인간의 깊이를 담은 ‘존재의 풍경’에 몰입했습니다.
실존주의 사상에 몰두했던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외부 세계의 장식보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택했습니다.
“존재는 문제다.”
이 간결한 선언이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화두가 되었습니다.
■ 선(線)으로 새긴 고독의 언어
1970년대 물감조차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작가는 문방구에서 크레파스를 집어 들었습니다.
아이들의 그림 도구로 불리던 크레파스는, 그의 손에서 덧칠하고, 문지르고, 긁어내는 감정의 장치로 바뀌었습니다.
그 위에 감정을 쌓고, 지우고, 숨기고, 다시 그리는 방식으로 20년 이상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작가는 “칼로 긁는 선의 예리함이 참 좋았다. 크레파스 작업은 어쩌면 색보다 선이 더 중요하다”라며 그러한 행위가 훗날 드로잉 작업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의 드로잉은 단 몇 즐의 선만으로도 인간의 쓸쓸함과 존재의 무게를 불러옵니다.
공간을 압도하는 아우라와 절제된 선의 긴장감, 그 안에는 고요하면서도 단단한 질서가 살아 숨쉽니다.
그 힘은 오랜 시간 크레파스를 덧칠하고 또 지우며 쌓아온 선(線)의 훈련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장면 하나하나는 완결이 아니라, 흔적이며 반복,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끈질긴 탐색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 군중 속의 고립, 얼굴 없는 군상
2000년대 이후 유화로 그려진 연작 ‘너의 어두움’은 단순화된 인물 군상들을 통해 고립의 형상을 가시화합니다.
모노톤의 색면 안에 병렬로 선 인물은 서로를 향하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으며, 시선을 돌리거나 등을 보이고 있습니다.
바로 그 거리감 속에, 오히려 감정의 밀도는 한층 더 농밀하게 다가옵니다.
그림 속 ‘너’는 곧 ‘나’이며, 우리가 외면하고 외면당한 내면의 한 조각입니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고립되어 있습니다.
서로를 향하지 않은, 때론 엇갈린 시선이 교차합니다
그러나 그 거리감 속에서 오히려 더 진한 감정의 진동이 느껴집니다.
그림 속 ‘너’는 작가 자신이자, 이 사회의 고독한 우리 모두입니다.
화폭을 통해 타인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구조 자체를 해부하고 있는 셈입니다.

■ 좁은 삶의 반경에서 길어올린 심연
작가는 공황장애로 인해 서귀포 솔동산 일대 반경 2~3km를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좁은 세계 안에서 누구보다도 깊은 내면의 우주로 들어갔고, 불안과 공포 속에서 그림은 유일한 숨구멍이자, 자기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태풍이 오는 날이면 정전의 공포로 밤을 지새웠고, 어둠을 견디기 위해 초를 밝히고 하룻밤에 8점을 그린 적도 있습니다.
그림은 생존이자 구조였고, 자기 자신을 붙잡기 위한 마지막 언어였습니다.
성당 종탑에서 45년째 저녁 6시에 종을 울리는 작가는, 스스로 ‘종지기 화가’라 부릅니다.
신앙과 회화, 두 기둥이 그의 삶을 지탱해온 셈입니다.
그가 치는 종소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그림 역시 누군가에게 조용히 닿기를 바라는 기도로 울림을 더했습니다.

■ 침묵의 언어로 오래 머무는 울림
작가의 그림은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침묵은 오히려 가장 깊은 언어로, 보는 이들을 흔듭니다.
작품 앞에 선 순간, 결국 마주하는 건 우리 자신의 어둠입니다.
그리고 그 어둠을 피하지 않는 이들에게, 이 전시는 오래도록 머무는 반향으로 말을 건넵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오랜 작업을 아껴온 다수의 소장자들이 자발적으로 작품을 출품하면서 성사됐습니다..
송정희 ‘갤러리 누보’ 대표는 “소장자들 한 분 한 분을 만나, 왜 이 작품을 간직해왔는지 들을 수 있었던 시간이 큰 감동이었다”라며,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고영우 작가에 대한 체계적인 아카이빙 작업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전시 기간 중에는 ‘소장자와의 대화’, 전시 해설 프로그램도 함께 진행합니다.
특히 4월 한 달간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4시에 전시 해설 시간을 마련해 작가와 작품, 관람자, 그리고 시간을 함께 축적해온 이들 간의 깊은 예술적 공명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전시 기간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 가능합니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입니다.
무료 관람이지만, 제주돌문화공원 입장료는 별도로 부과됩니다.
전시와 프로그램 관련 문의는 ‘갤러리 누보’로 하면 됩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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