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플러스] 바늘도둑서 소도둑 된 탈북민… 수천명 농락하다 '빈손' 최후

위용성 2025. 3. 29.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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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명 피해' QRC뱅크 사기극 재구성
건강식품업체서 회삿돈 횡령 범죄 시작
수차례 전과 생기고도 본격 판 벌이기로
"투자하면 300% 수익" 탈북민·노인 현혹
징역형·130억 환수 확정받고도 '버티기'
청담동 고급 아파트 살며 캐나다행 준비
피해자 자살에도 "0.01%도 후회 안 해"
게티이미지뱅크.

"블록체인 기술인 QRC페이먼트 시스템으로 법정 화폐를 쉽고 빠르게 암호화폐 자산으로 바꿀 수 있으며, 거래·결제·송금·환전까지 편리하고 안전하게 할 수 있다. QR코드로 온오프라인에서 암호화폐를 다른 암호화폐와 실시간으로 교환하거나 계좌 인출도 가능하다. 상대방 휴대폰 번호만으로도 스피드하게 송금할 수 있어 매우 편리하다. QRC뱅크는 4차 산업혁명시대의 금융업으로 이해하면 된다."

2020년 7월 서울 강남에서 열린 한 사업설명회. 고모(43)씨는 일명 '회장' 안모씨, '부회장' 김모씨와 함께 투자자들 앞에 섰다. 자신들이 설립한 금융플랫폼 QRC뱅크를 나스닥에 상장해 '세계 최초의 블록체인 기반 금융 핀테크 전문기업'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회사 이름을 딴 코인을 유명 해외 거래소에 상장했다며 이곳에 투자하면 원금 보장은 물론, 수익률 300%를 낼 수 있다고도 홍보했다. "투자하면 평생 연금처럼 돈 벌면서 편하게 살 수 있다. 세계적인 금융기관만 보증을 서주는 은행에서 우리 업체 컨펌에 들어갔다. 1조를 보증 세우면 500조까지 쓸 수 있고, 부도가 나면 500조를 물어주기로 했다"는 얘기도 했다.

A씨는 고씨 일당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발을 동동 굴렀다. 지인에게 빌린 돈과 카드론까지 '영끌'해서 돈을 넣었지만, 약속한 수익금은 처음 몇 달 동안만 입금되다 끊겼다. 본부장과 팀장은 메시지를 읽지도 않고 연락이 두절됐다. 그러다 카카오톡으로 공지 한 통이 날아왔다. "현 시간부터 정산된 리스트대로 지급되고 있습니다. 추가적으로 정산 진행될 예정입니다. 임직원 일동." 동요하지 말고 믿고 기다리라는 메시지였지만, 돈은 지급되지 않았다.


말단 직원에서 불법 다단계 경영자로

고씨는 20대 때 한국으로 넘어온 북한이탈주민이다. 2012년 건강식품업체에 취업했다가 회삿돈 횡령 혐의로 형사처벌을 받았다. 한번 범죄에 발을 들인 고씨는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점점 대담하게 범행했다. 2015, 2016년 다단계업체에 취업해 유사수신행위에 가담했고, 2018, 2019년에는 또 다른 다단계회사에서 직접 운영자로 뛰기도 했다. 세 차례나 형사처벌을 받았지만, 오히려 전과로 쌓은 노하우를 이용해 더 큰 판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고씨 일당은 QRC뱅크를 포함해 총 4개 법인을 세웠다. 고씨는 회사 4곳을 총괄·운영했고 '회장'은 투자자 모집·영업조직 관리, '부회장'은 투자금 등 자금 관리 역할을 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온 허풍은 황당했다. QRC뱅크가 미얀마 카지노, 인공지능(AI), 의료폐기물 소각장 투자, 우체국 결제시스템 연계 사업, 물류쇼핑몰기지 설립, 파주 별장·강남역 오피스텔 임대, 중국 앱 인수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큰 수익을 내고 있고 앞으로도 성장이 유망한 회사라고 투자자들을 속였다. "장차 우리는 카카오뱅크를 인수하고자 한다"고 떠들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유튜브에 게재돼 있는 QRC뱅크 홍보영상. 유튜브 영상 캡처

고씨는 투자자들의 믿음을 사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캄보디아에서 디지털뱅크 사업을 추진한다며 정체 불명의 인물을 '캄보디아 부수상'이라고 내세워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 QRC뱅크 광고가 실린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물론 조작된 합성 사진이었다. 고씨는 과거 사기 행각을 벌일 때 국회의원 등 유명 정치인과 함께 사진을 찍은 것처럼 합성해 광고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범행 대상은 자신과 같은 북한이탈주민들 또는 중국동포, 노인들이었다. 코로나19 시기 코인 등의 자산가치가 급등하자, 이에 편승해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을 집중 공략했다. 국내 탈북민 커뮤니티가 폐쇄적인 탓에 고씨의 사업은 입소문을 타고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피해자들은 지인 소개로 투자한 경우가 많았다.

고씨는 대외적으로는 멀끔한 IT기업 창업자 행세를 했다. 2020년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는 스스로를 "어려서부터 남달리 숫자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고, 철저한 경영 마인드를 지닌 사업가"라고 소개했다. 같은 해에는 저서 '마이 프리덤'(My Freedom)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온라인 서점 홈페이지 작가소개란에 이렇게 썼다. "세상에 변화를 주고 싶은 사람이다. 금융의 혁신적 기술과 금융의 문화를 조화롭게 융합시키고자 하는 꿈이 존재한다. '금융의 자유로움'이란 브랜드를 구축하는 비즈니스로 세상과 마주하는 QRC뱅크의 대표다."


6단계 피라미드 구조 세우고 '돌려막기'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들의 영업 방식은 피라미드 구조의 전형적 다단계 형태였다. 하위 투자자들을 끌어오면 '홍보 매칭 보너스'를 지급하고 회원→팀장→과장→부장→본부장→이사로 승진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하위 투자자들을 모아 1억5,000만 원을 끌어오면 팀장을 달아주고 회사 매출의 5%를 분배하는 식이었다. 6억 원이 쌓이면 과장 직급을 주고 매출의 1.5%를 나눠줬다. 고씨는 이렇게 '파로스등대 지점' '대박그룹 지점' '강남클로버 지점' 등 전국 곳곳에 이름뿐인 지점들을 세워 조직망을 촘촘히 관리했다.

하지만 사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수익도 나지 않았다. 투자자들에게 지급하는 보상은 후순위 투자자들의 돈을 선순위 투자자들에게 나눠주는 '돌려막기'로 지급됐다. 하지만 한 번 발을 들여 놓은 투자자들은 좀처럼 발을 빼기 어려웠다. 일정 기간 내 새로운 투자자를 모집해오지 않으면 회원 코드를 삭제당하거나 직급 유지를 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다. 투자자들 다수는 지급받은 수당을 재투자할 수밖에 없었다.

고씨 등은 범죄를 인지한 수사기관의 압수수색이 시작된 이후에도 투자자 모집을 멈추지 않았다. 사기라는 걸 알아챈 피해자들에게는 합의를 종용했다. 피해자들은 원금이라도 회수하려고 고씨에 대한 처벌 불원서를 법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1년 8개월간 피해자는 4,400여 명, 피해금액은 2,000억 원에 달했다.


"범행 후회 없다" 버텼지만 전액 환수

고씨 일당의 사기 행각은 금세 탄로났다. 고씨는 2023년 12월 사기 및 유사수신행위법 위반 등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0년에 범죄수익 130억 원 추징이 확정됐다. '회장' 안씨는 징역 5년, '부회장' 김씨는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고씨 일당은 수감됐지만, 범죄수익 130억 원을 되찾아 피해자들에게 돌려주는 일이 남았다. 고씨는 추징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버텼다.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부장 유민종)는 지난해 6월부터 본격적인 자산 추적에 돌입했다.

고씨가 생활했던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수십억 원대 펜트하우스 내부. 검찰이 압수한 고씨의 은닉자산 중 하나다. 서울중앙지검 제공

검찰 수사 결과 고씨는 투자자 모집을 시작하면서 거의 동시에 범죄수익을 은닉했다. 그는 위장 이혼한 아내에게 수익의 상당 부분을 돌려놓은 상태였다. 아내에게는 "너 따위는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돈을 줬다. 가진 것 전부 잃기 싫으면 조용히 하고 살아라"고 입막음했다. 부동산투자업체, 여객업체 등을 세워놓고 법인 명의로 은닉하기도 했다. 고씨와 가족들은 수십억 원대 서울 청담동 펜트하우스에서 살면서 자녀에게는 고액의 아이스하키 과외를 시켰다. 고씨는 그동안 끌어모은 범죄수익으로 캐나다로 건너갈 계획까지 세웠다.

검찰은 계좌 및 해외 가상자산 추적, 압수수색 등 반년간의 끈질긴 추적 끝에 추징금 130억 원을 전액 환수하는 데 성공했다. 고씨의 은닉 자산은 펜트하우스 외에도 성남 분당구 아파트, 서울 서초구 상가·오피스텔, 롤스로이스·람보르기니 자동차, 고가 미술품 7점, 시가 1억 원이 넘는 시계들, 귀금속·명품가방 등 화려했다. 상장주식과 수십억 원 상당의 가상자산도 모조리 환수당했다.

검찰이 압수한 고씨의 롤스로이스 자동차. 서울중앙지검 제공

고씨는 죄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사가 본격화돼 형사처벌이 임박하자 아내에게 '가족들이 잘살 수 있게 돼 범행을 0.01%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했다. 피해자 일부가 경제적 심리적 고통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전혀 뉘우치지 않았다. 검찰은 지금도 피해자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며 환부 작업을 하고 있다.

위용성 기자 u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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