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판의 전설, 이기고 지는 데 도리 없는 《승부》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2025. 3. 2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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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발굴한 천재…‘전신’ 조훈현과 ‘산신’ 이창호의 실화 다뤄
코로나19에 유아인 논란까지…개봉까지도 우여곡절

(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승부는 이기고 지는 일이다. 이기는 쪽과 지는 쪽이 반드시 존재한다. 겨루는 상대가 사제지간이라 해서 이 법칙이 깨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 속 인상적 대사를 빌려오자면 "도리 없다. 그것이 승부니까". 영화 《승부》는 대한민국 바둑의 전설들이 벌인 명승부의 시간을 따라간다. 사제지간으로 만나 피할 수 없는 대결을 펼친 전신(戰神) 조훈현과 산신(算神) 이창호. 그들의 몇 번의 계절이 바둑판 위에서 함께 치열하게 흘렀던 시간의 이야기다.

영화 《승부》 포스터 ⓒ(주)바이포엠스튜디오

황제와 돌부처의 승부

"바둑의 신하고 둔다고 해도 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바둑 종주국 중국의 최강자를 물리친 쾌거는 조훈현을 세계 최고의 승부사 자리에 올렸다. 1989년 9월,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서 중국 최강자 섭위평 9단을 물리치고 대회 초대 우승자가 된 그는 바둑의 변방이었던 한국을 단숨에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승부》는 그 영광의 순간으로부터 시작한다. 금의환향한 조훈현(이병헌)이 쉽게 땅으로 내려올 일은 없을 듯 보였다. 전북 전주시의 한 금은시계방 한편에서 바둑돌에 심취한 한 어린 소년을 만나기 전까지는.

조훈현은 천재라 소문난 어린 소년 이창호(김강훈)를 만나 그의 가능성을 알아본다. 그러곤 그를 제자로 들인다. 스승의 집에서 동거하며 가르침을 받도록 데려온 것이다. 실제로 조훈현은 열 살 때부터 10년간 현대 일본 바둑의 개척자인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의 제자로 들어간 이력이 있다. 스승의 가르침대로 도리와 의무를 다하며 거두어 먹이고 가르치며 키운 제자는 15세부터 스승의 타이틀을 하나씩 가져가기 시작한다. '황제' 조훈현의 긴 어둠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황제가 발굴한 천재. 실화가 이미 드라마틱하다. 《승부》는 영화적 허용 안에서 어린 창호를 어른들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당찬 캐릭터로 묘사한다. 정석대로 하지 않고 자신만의 기술을 만들려는 창호를 스승은 단호히 꾸짖는다.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정석을 익히며, 체력을 먼저 키우라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다.

실제로는 어땠을까. 훗날 조훈현 국수는 어린 이창호를 만났던 순간을 회고하며 어린아이답지 않았던 과묵함을 이야기한 바 있다. '말하고 싶은데 참는 것, 아는 데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어린아이가 분명 자신의 의지로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자기 나름으로 바둑을 꾸려 가려는 '꿍심', 즉 보기와는 딴판으로 은근히 품고 있는 야심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승부감각이 절정인 서른두 살의 나이에 제자를 들인 조훈현이 예상하지 못한 단 하나의 지점은, 이창호가 너무 빠르게 성장한다는 점이었다. 《승부》는 바둑 영화이자 그래프의 영화다. 정점에서 예상치 못하게 하강하는 조훈현, 빠르고 힘 있게 치고 올라오는 이창호(유아인), 두 사람이 교차하는 지점에 치열한 승부가 있다. 그리고 심리적 바닥을 찍었던 순간에 자기 자신을 이겨내고 다시 바둑돌을 집는 승부사들의 인고는 점점이 찍혀, 서서히 상승하는 각자의 선을 만들어낸다.

영화가 이미 보장하는 재미는 당연히 이 두 바둑 천재의 대국으로부터 나온다. 바둑의 핵심을 전투로 인식하며 "물고 뜯고 덤비고 싸우는" 공격을 밀고 나오는 스승과는 달리, 투박하고 느리더라도 결코 지지 않는 바둑을 두고 싶은 '돌부처' 스타일의 제자가 맞붙는 승부.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대국임에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묘사들이 연이어 화면을 가로지른다. 승리를 직감하면 다리를 떨던 조훈현 특유의 여유,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가능성을 그리며 '계산의 귀재'로 불리던 이창호의 침착함은 소리 없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승부》의 핵심은 이들이 맞붙는 순간이 아니라, 두 인물이 각자만의 딜레마와 고통을 극복하려는 순간들의 묘사에 있는 듯하다. 조훈현에게는 제자와의 대결에서 패하고 무너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백이 필요하다. 깊은 좌절과 두려움을 마주한 그에겐 초심, 즉 바둑을 두는 마음의 본질을 되찾는 긴 과제가 주어진다.

그런가 하면 도전자에게는 또 다른 모양의 고통이 존재하는 법이다. 이창호는 거대한 산 같은 스승을 마주한 열패감을 다스리며 자신만의 비기를 만들기 위해 바둑돌을 쥐고 또 쥔다. 먹여주고 길러준 스승의 등에 비수를 꽂았다는 세간의 말들과, 불편한 속내를 차마 감추지 못하는 스승의 얼굴 앞에서 버티며 갈고닦는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이 지목한 라이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피할 수 없는 승부에 나서는 사람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이 아니라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연일 수밖에 없는 이유. 이 영화의 진짜 방점은 여기에 찍혀 있다.

영화 《승부》 스틸컷 ⓒ(주)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 《승부》 스틸컷 ⓒ(주)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 《승부》 스틸컷 ⓒ(주)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 《승부》 스틸컷 ⓒ(주)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 《승부》 스틸컷 ⓒ(주)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 속 운명 닮은 《승부》의 곡절

영화 속 두 사람의 운명을 닮은 것일까. 개봉 자체도 승부사의 여정이다. 2021년 4월 촬영을 마쳤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극장을 덮쳤다. 그사이 원래 투자배급사인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가 넷플릭스에 배급권을 넘겼고, 영화는 2023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예정이었다.

그러다 2023년 2월 배우 유아인의 마약 투약 혐의가 불거졌다. 배급권은 다시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에 돌아왔지만 회사가 영화 사업을 접었다. 표류하던 이 영화가 극장에 걸릴 수 있었던 건, 최종적으로 바이포엠스튜디오가 배급을 맡았기 때문이다. 바이포엠은 배우 곽도원의 음주운전 혐의로 무기한 연기됐던 영화 《소방관》의 극장 개봉을 감행해 흥행(385만 명)으로 이끈 회사다.

비록 오랜 시간을 돌아 관객 앞에 당도했지만, 여전히 그 진가는 빛을 잃지 않은 영화이기에 다행스럽다. 관록의 이병헌과 침착한 패기의 유아인. 두 배우의 마주함은 각자의 레이스에서 '연기 9단'의 경험치를 쌓아온 이들의 화합과 승부의 쾌감을 최대치로 전달한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는 것. 완벽에 가까운 경지가 바둑판을 마주한 두 배우로부터 힘 있게 구현된다.

조연의 배치와 활용도도 좋은 편이다. 조우진, 고창석, 고(故) 남문철, 문정희 등 조연배우들은 바둑판의 좋은 포석, 즉 '집을 차지하는 데 돌을 벌려놓는 것'에 충실하면서도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한다.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이견이 생기기 어려운 영화다.

유아인이 연기한 이창호를 제외하고는 영화 자체가 전개되지 않으므로, 그의 촬영 분량이 덜어진 바는 없다. 대신 유아인은 영화의 포스터를 포함한 사전 홍보물에서 제외됐다. 언론시사회 등 홍보 일정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배우의 범죄가 아니었다면 《승부》는 영화 외적으로도 남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충무로 전통의 강호 이병헌과 새로운 세대의 주축인 유아인의 만남. 그들의 화합과 승부는 조훈현과 이창호가 이뤄온 길에 언뜻 겹쳐 보이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가 한창 촬영 중이던 2021년 청룡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 후보로 나란히 오른 두 배우 중, 수상의 영예를 차지했던 이는 《소리도 없이》의 유아인이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영화의 대사를 빌리자면, 도리 없다. 이 역시 《승부》가 받아든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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