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던 사회운동가가 ‘걷기 명상’으로 나아간 까닭
화려한 표지는 없다. 책 표지와 본문 모두 검정만 사용했다. 판형도 작은 46판형으로만 낼 계획이다. 에너지·자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기적의 마을책방’은 지난 2월 세 번째 책 〈주권자 국민이 만든다, 제7공화국〉을 펴냈다. 생태주의자 박승옥 대표(72)가 충남 공주에서 운영하는 출판사다.
함께 〈녹색평론〉 편집 자문위원을 맡았던 이문재 시인은 그를 두고 “평생 운동을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박승옥 대표는 1970년대 학생운동부터 시작해 노동운동, 에너지 전환 등 환경운동, 협동조합 운동 등을 해왔다. 출판문화 운동도 그중 하나다. 박 대표는 1980년대 초반, 돌베개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하며 ‘전태일 평전’을 펴낸 것을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경험’이라고 말한다(당시 전태일 평전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박승옥씨는 1990년대 전태일노동자료연구실 대표를 하기도 했는데,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전태일 평전’ 출간에 이르기까지 사연이 있다. 1980년 비상계엄 당시 그는 서울역 앞 시위에 나섰다가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출소 이후 돌베개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나중에 편집장으로 일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1981년 1월 청계노조를 강제 해산하자, 조합원들이 미국의 노동기구인 아시아아메리카자유노동기구 서울 사무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박씨는 그 점거 농성을 알리는 유인물을 대학 친구와 함께 구로공단 노동자 밀집지역에 뿌렸다. 잡히면 무조건 구속을 감수해야 했다. “통행금지가 있을 때였고, 어두운 저녁에 두세 시간 뿌렸는데, 그때 그 시공간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보다 더 길고도 먼 길처럼 느껴졌다.” 점거 농성, 유인물 배포 계획을 짜면서 민종덕 청계노조 집행부 사무장을 알게 되었다.
그가 돌베개 편집장으로 일할 때, 조영래 변호사가 1970년대 수배 중에 쓴 전태일 평전 원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 본 글이었다. 박씨는 민종덕씨와 의논해 ‘전태일 평전’을 출간하기로 했다. 출간되면 필자가 구속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필자 이름을 누구로 할까’가 고민스러웠다. 출간 논의 과정에서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회장이던 문익환 목사가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나섰다.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으로 평전이 출간되었다. “책 나오고 나서 구속되고 책을 뺏기면 어떻게 할지 시나리오를 다 짜두고서 출간했다. 그런데 안 잡아가더라고(웃음). 1983년 유화 국면 덕을 봤다.” 출간 이후 그 책을 읽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전화를 받으면서 그는 전태일 사건을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기적의 마을책방’의 두 번째 책으로 〈지금 여기 전태일〉을 펴낸 것도 그때의 경험과 무관치 않다.
박씨는 1990년대 초반에 양평, 여주, 김천으로 이주했다. 유기농 농사를 하고 책을 읽었다. ‘생태주의’라는 용어가 익숙하지 않을 때였다. 그는 “우리 세대 운동가들은 환경운동가 최열 선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라고 말했다.
2004년 그는 노동운동의 생태적 전환을 촉구하는 글(‘노동운동, 종말인가 재생인가’)을 발표했다. 노동운동의 위기를 주제로 꽤 큰 논쟁이 붙었다. 그 글을 본 당시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편집인에게서 연락이 와 〈녹색평론〉 편집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녹색평론〉을 중심으로 공유경제, 지역순환경제, 협동조합, 직접민주주의, 에너지 전환 등에 관한 글을 많이 썼다.
그러다가 2009년 10월, 당시 마곡사 주지였던 원혜 스님의 제안을 받았다. 농사를 중심으로 귀농 생태공동체를 구상해보는 일을 함께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그때부터 충남 공주에 살면서 이러저러한 지역 활동을 하게 되었다.
삶의 전환점이 된 ‘걷기 명상’
지난해 7월에 낸 ‘기적의 마을책방’의 첫 책 〈어떻게 걸어야 하나〉는 ‘걷기 명상’을 담고 있다. 거침없이 논쟁에 뛰어들었던 이력과 ‘걷기 명상’,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2020년 7월에 겪었던 어떤 경험이 그를 걷기 명상으로 이끌었다.
그는 초저녁에 자고 새벽 1~2시쯤에 일어난다. 책을 읽고 쓰고 새벽 산책을 한다. 수십 년 된 습관이다. 어느 날, 어두컴컴한 새벽에 마곡사 인근을 산책하다가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았고,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기다시피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사막에서 생존의 오아시스를 찾듯’ 불경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지켜본 원혜 스님이 짧은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경전을 읽고 호흡 명상을 해서 뭐 하려고 그래요? 깨달아서 뭐 하려고 하는 거요?” 간화선(화두를 사용해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선)의 질문이었다.
원혜 스님의 질문 이후 새벽 산책을 새벽의 걷기 명상으로 바꾸었다. ‘우리 몸의 가장 낮은 곳은 발바닥이고, 지구별 행성의 가장 높은 곳은 울퉁불퉁 높고 낮은 지표면 땅입니다. 가장 낮은 발바닥과 가장 높은 지표면 땅이 만나 두 발 걷기라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발바닥의 느낌과 들숨날숨 호흡을 알고 살피고 알아차림으로써 내 삶을 기적으로 바꾸는 생생한 현존의 걷기.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면서 오직 발바닥 느낌과 들숨날숨 호흡만을 알아차림 하고 주의집중 하는 것.’ 박승옥 대표가 말하는 ‘걷기 명상’이다.
그는 걷기 명상을 하면서 ‘그동안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해 또 다른 나로 대하지 않고, 어떤 일과 사업의 대상과 수단으로 대했는지도 뼈저리게 반성하게 되었다’고 책에 적었다. 일·과제 중심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부터 살펴보게 된, 삶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한 달에 한 권 책을 정해서 책 읽기와 독후감을 쓰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했다. 틱낫한 스님의 걷기 명상 소책자를 첫 번째 책으로 정하려 했다. 그런데 이미 절판돼 책을 구하기 어려웠고, 번역·출간하려고 알아보니 저작권료가 비쌌다. 원혜 스님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 “박 대표가 쓰지 그래요”라고 권했다. 기적의 마을책방의 첫 책 〈어떻게 걸어야 하나-원혜·박승옥 함께 걷고 박승옥 적다〉는 그렇게 나왔다.
사회운동에 열성적이다가 개인 내면을 살핀다고 하면 현실 문제와 거리를 두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박승옥 대표는 자기 삶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실천을 강조한다. 지난해 12월3일 그의 표현대로 ‘12·3 윤석열의 난’ 이후에 〈주권자 국민이 만든다, 제7공화국〉을 썼다. 거리의 응원봉 시위와 수많은 창의적 깃발들을 보고서 그는 “윤석열의 난은 진압될 것이고, 이번이야말로 헌법·법률을 국민이 개정할 수 있는 국민발의제, 공직자에 대한 국민소환제 등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넣은 개헌이 가능한 기회라고 여겼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을 국민투표로 뽑은 것은 주권자 국민이다. 대통령 탄핵 또한 당연히 주권자인 국민이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 대통령 탄핵을 왜 국회의원 300명과 헌법재판소 재판관 9명에게 맡겨야 하나? 지금은 탄핵·파면에 집중할 시기가 맞다. 그런데 탄핵이 인용돼 대통령이 파면되고 대선 국면으로 들어가게 되면 개헌 이야기가 봇물처럼 나올 것이라고 본다. 그때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헌법 개정에 반영해야 한다.”
“3.5%의 비폭력 행동이 세상을 바꾼다”
박승옥 대표는 충남 공주에서 지역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농민회 활동을 하고, 지역 주민을 만난다. 사회운동과 관련해 그가 말하는 ‘도원결의, 던바의 수, 3.5%의 법칙’이 흥미롭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운동이나 사업에서 자신의 삶을 먼저 바꾼 초동 주체가 〈삼국지〉처럼 도원결의하는 게 중요하다. 이들이 중심이 돼 150여 명을 규합한다. 한 사람이 터놓고 신뢰하는 사람의 숫자는 150명 안팎이고, 진화인류학자 로빈 던바가 역사 기록과 최근의 SNS까지 조사한 결과 그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게 ‘던바의 수’다. 또 미국의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스가 전 세계 국민저항행동 사례를 분석한 결과, 국가 차원이건 단체 차원이건 구성원 가운데 3.5%가 비폭력 행동에 나서면 그 집단행동은 성공한다. 이른바 3.5%의 법칙이다.
박승옥 대표는 “공주시민의 3.5%가 비폭력 행동에 나서면 공주시가 바뀐다”라고 말한다. 박 대표는 60대 이상의 노년 세대가 함께하는 ‘60+기후행동’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공주 지역에도 이 단체 활동에 뜻이 같이하는 사람이 여럿이다. 박 대표는 그들과 함께 매주 월요일 오전 7시30분에서 9시까지 공주 시내 출근 인파가 가장 많은 전막사거리에서 ‘어슬렁 기후 피케팅’을 한다. 기후·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방경석 신관동성당 신부를 비롯해 가톨릭 교인, 청년 등 20여 명이 참여한다. 3월10일 아침, 박승옥 대표는 ‘기후는 변화하고 있는데 우리는 변화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적은 종이 피켓을 들었다.
박승옥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햇빛학교는 마곡사 바로 밑 옛 고등공민학교 폐교 자리에 있다. 30년 넘게 비어 있던 건물을 임차해서 고쳐 쓰고 있다. 마을공동체 학교이자 치유 명상 학교다. 코로나19 여파로 2년 이상 학교 문을 닫기도 했다. 재정이 넉넉지 않아 리모델링 공사가 몇 년째 이어졌다. 교실 한 칸을 ‘기적의 마을책방’이라는 서점으로 만들고 있다. 올해 여름부터 쓰기·읽기를 중심으로 한 예술 치유 명상캠프, 민주주의 시민교육 워크숍을 햇빛학교에서 하는 게 목표다. 날이 좋으면 학교 앞 공터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며 프로그램을 진행하려 한다. 박승옥 햇빛학교 이사장은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많이 지쳐 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너무 일 중심으로만 활동해서 그렇다. 개인의 깨달음만 추구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실천을 함께하는 시민사회·지역 활동가들이 공동의 명상을 할 수 있는 그런 워크숍·프로그램을 해보려 한다”라고 말했다.
공주·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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