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재 셰프님, 맛을 입으로만 보나요? [삶과 문화]

2025. 3. 2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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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예능 역사의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장사 천재와 미식 예술가가 검은 눈가리개를 하고, 곧 입 안으로 침투해 들어올 알 수 없는 음식을 무방비 상태로 입을 벌려 받아들이던 순간은.

그러니 입을 벌리고 남이 떠먹여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수동적인 행위는 맛이 지닌 그 전체를 온전히 느끼지 못하게 한다.

맛 경험이 혀에만, 입에만 있다면, 우리에게 궁극의 음식이 집밥일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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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서 안대를 쓰고 블라인드 심사 중인 안성재 셰프. 넷플릭스 유튜브 캡처

요리 예능 역사의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장사 천재와 미식 예술가가 검은 눈가리개를 하고, 곧 입 안으로 침투해 들어올 알 수 없는 음식을 무방비 상태로 입을 벌려 받아들이던 순간은. 요리사도, 그의 스타일도 차단한 채 “오직 ‘맛’으로만 승부하겠다”는 프로그램의 기치가 극적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해당 에피소드가 공개되자 수많은 패러디 영상들이 뒤를 이었다. 쇼적인 재미로는 그야말로 히트였다.

그런데 맛 경험 자체만을 생각해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론 맛은 입에서 시작된다. 음식 입자들이 혀 표면의 돌기 안에 위치한 미각수용체에 닿으면 여기서 유발된 전기 신호가 뇌의 미각 중추로 전달된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감각 기관으로 입력된 정보들도 미각 중추에 영향을 미친다. 음식의 냄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촉감과 소리뿐만 아니라 음식의 색과 모양도 맛 경험을 만든다. 찰스 스펜스 옥스퍼드대 실험심리학과 교수에 따르면, 풍미의 지각은 시각, 청각, 후각과 촉각이 맛의 경험 형성을 돕는 다감각 현상이다. 오방색이 방사형으로 곱게 담긴 비빔밥을 눈감고 먹으면 그 맛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요리사는 최고의 맛을 위해 식재료의 식감과 색상의 조화를 고려하고, 썰린 모양과 크기를 조절한다. 나아가 음식이 담기는 그릇의 색, 모양과 재질을 고민한다. 심지어 접시를 고른 후에도 접시 위 어느 쪽에 음식을 얼마나 어떤 모양으로 놓을지 심사숙고해 결정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은 단지 말의 표현이나 느낌적인 느낌이 아니다. 이런 결정들이 맛을 바꾼다. 예컨대, 비대칭의 표면이 거칠거칠한 그릇은 신맛의 풍미를 올려준다. 차가운 맥주는 투명한 유리잔에, 탁주는 불투명한 도기나 금속 사발에 부어 마시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수저와 포크, 나이프는 또 어떤가. 파인다이닝의 테이스팅 메뉴에서 매번 음식에 맞추어 커틀러리를 바꿔 주는 것은 괜한 유난이 아니다. 먹는 사람이 사용하는 식사 장비의 경우 손에 잡히는 질감과 무게도 맛에 관여한다. 그러니 입을 벌리고 남이 떠먹여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수동적인 행위는 맛이 지닌 그 전체를 온전히 느끼지 못하게 한다. 비빔밥의 맛 경험은 내 손으로 정갈하게 놓인 나물을 흐뜨려 장과 밥과 함께 쓱쓱 비비는 동작에서 이미 시작된다.

음식을 먹는 환경도 무시할 수 없다. 카페 음악 소리, 레스토랑 인테리어에 따라 풍미는 다르게 지각된다. 추운 겨울날 바래다주는 길에 헤어지기 아쉬워 머물던 포장마차의 국물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두운 포장 천막 속 흔들거리던 불빛의 색감 때문이거나, 미끄러질 만큼 가벼운 플라스틱 의자를 바짝 붙여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앉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니 눈을 떠 요리된 재료들의 색과 모양새를 살펴보고, 내가 씹어 삼키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보자. 그릇의 모양과 음식의 담김새도 음미해보고, 컵의 온도, 표면의 질감, 수저의 무게도 느껴보자. 함께 나누는 사람의 음성에 집중해보고, 머리를 들어 주변도 한번 둘러보자. 맛 경험이 혀에만, 입에만 있다면, 우리에게 궁극의 음식이 집밥일 리 없다. 온몸으로 맛을 보면 매일 먹던 된장찌개가 완전히 새로운 풍부함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김채연 고려대학교 심리학부 교수·뇌인지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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