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집채만 한 불똥이 날아다녀… 지구 종말이 온 줄 알았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연기로 눈앞이 새카만데 산은 봉화 올리듯 타오르고집이고 밭이고 다 버리고 왔지. 종말이 온 줄 알았어."
26일 경북 영양군에 위치한 임시대피소 영양군민회관에서 만난 신정한(61)씨는 전날 화마가 집을 집어삼키던 순간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쳤다.
곳곳이 그을린 데다 연기를 마셔 눈물샘이 부어오른 반려견을 품에 꼭 안은 김모(67)씨도 "개 목줄을 끊어내는 동안 불길이 코앞까지 닥쳤다"며 "그냥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달렸다. 집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구조 기다릴 새도 없이 목숨 건 '탈출'
이재민 수백 명 가득 찬 대피소 열악
"오늘 밤 또 올라"... 화마 공포 여전
“연기로 눈앞이 새카만데 산은 봉화 올리듯 타오르고…집이고 밭이고 다 버리고 왔지. 종말이 온 줄 알았어.”
26일 경북 영양군에 위치한 임시대피소 영양군민회관에서 만난 신정한(61)씨는 전날 화마가 집을 집어삼키던 순간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쳤다. 석보면 화매리에 있는 신씨 집은 매캐한 산불 연기로 인해 오후 5시인데도 한밤처럼 깜깜했다. 휴대폰 라이트에 의존해 겨우 운전대를 잡은 신씨는 아내, 이웃까지 6명을 싣고 차로 약 25분 거리의 임시대피소로 왔다. 집채만 한 불덩어리가 차 양옆으로 떨어져 운전 내내 두 손이 후들댔다. 폭격 같은 산불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그는 밭과 집 등 수십 년을 보낸 터전을 한순간에 잃었다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구조 기다릴 새 없이...목숨 건 탈출
22일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불이 강풍을 타고 안동·영양·청송·영덕까지 순식간에 번지며 산자락에 사는 주민들의 급박한 탈출이 이어졌다. 이들은 통신이 끊긴 상황에서 구조를 기다릴 새 없이 이웃끼리 한 차를 타고 몸만 빠져나와야 했다고 간밤을 회상했다.
이날 오후 찾은 임시대피소는 500여 명의 이재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곳곳에 다인용 천막과 은색 돗자리를 깔고 누운 주민들은 "타죽는 줄 알았다" "전 재산이 불탔는데 어찌 사냐"며 울먹였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데리고 포산리에서 대피한 이순자(82)씨는 "거센 바람에 지붕이 날아다니고 사방이 불타서 꼼짝 못 하고 있다가 이웃 덕에 살았다"며 "급히 오느라 아들 혈압약도 못 들고 왔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곳곳이 그을린 데다 연기를 마셔 눈물샘이 부어오른 반려견을 품에 꼭 안은 김모(67)씨도 "개 목줄을 끊어내는 동안 불길이 코앞까지 닥쳤다"며 "그냥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달렸다. 집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지도 않다"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날 오후 4시 기준 가장 많은 사망자(8명)가 나온 영덕군의 임시대피소 영덕국민체육센터 역시 이재민들로 포화 상태였다. 영덕에선 기지국이 불에 타 주민들은 전날 대피 당시 통신 두절까지 겪었다. 아내와 함께 가까스로 몸을 피한 김용철(80)씨는 "노인들 사는 동네에 (불씨가) 폭탄처럼 집 안으로 들어와 불이 붙고 난리도 아니었다"며 "휴대폰이 먹통이 돼 전화도 지도도 못 봐 무서웠다"고 말했다. 지품면에서 남편과 함께 과수원을 하는 장소희(50)씨는 "밭에서 일하다 불길을 보고 바로 차로 달려갔는데 5분도 안돼서 (밭이) 활활 타고 있었다"며 "나무도 농기계도 다 타버려 이제 살아갈 길이 없다"고 고개를 떨궜다.
화마 공포는 현재 진행형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임시대피소 상황은 열악하기만 하다. 영양군민회관 내부엔 연기가 자욱했고 곳곳에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1층 구석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공기청정기에는 오후 내내 빨간불(위험·공기가 매우 나쁘다는 뜻)이 들어왔다. 영덕국민체육센터에서 만난 30대 주민도 "이재민 대부분이 지병이 있는 어르신인데, 대피 중 연기를 흡입하고 놀라셨을 노인분들을 며칠간 돗자리에 방치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화재가 언제 다시 닥칠지 모른다는 공포도 여전하다. 이날 오후 4시 30분쯤 영양군 임압면 주민의 대피를 촉구하는 재난문자가 오자 영양군민회관 이곳저곳에서 불안에 찬 웅성거림이 들렸다. 간신히 눈을 붙였다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이들도 있었다. 초등학생 자녀 셋과 함께 이곳으로 대피한 김수예(50)씨는 "(어젯밤) 정전이 됐는데 촛불만 봐도 심장이 벌렁대서 그냥 어둠 속에서 아이들을 껴안고 버텼다"며 "밤에도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해 불길이 다시 올까 봐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영양= 이유진 기자 iyz@hankookilbo.com
영양= 문지수 기자 door@hankookilbo.com
영덕= 김나연 기자 is2ny@hankookilbo.com
영덕= 최현빈 기자 gonnalight@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제는 尹 파면의 시간"... 서초동에서 한숨 돌린 野, 헌재 앞으로 | 한국일보
- '이재명 유죄'만 외치다 뒤통수 맞은 與 "대법원 빨리 선고해야" | 한국일보
- 천년고찰 고운사는 불탔지만... 방염포 덮은 안동 만휴정은 살았다 | 한국일보
- 임영웅, 세금 미납으로 마포구 자택 압류… 뒤늦게 완납 | 한국일보
- 윤다훈, 가족사 공개 "아내와 딸, 12세 차이" ('같이 삽시다') | 한국일보
- 안동대 학생 "강의 중 재난문자 100개 실화인가" 산불 확산에 SNS 목격담 이어져 | 한국일보
- 며느리 여러 번 찌른 70대, 법정서 "겁주려고 가볍게…" | 한국일보
- 김대호, MBC 퇴사 이유 이거였나... "출연료 150배 올라" | 한국일보
- 故 김수미 생전 일기 공개… 김혜자 "또 만나자" 문자에 서효림 눈물 | 한국일보
- "1시 이후에 오세요"...공무원 '점심시간 휴무제' 갑론을박 |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