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는 사라지고 소비만 남은 '지옥' [디스토피아+]
5편 가스파르 코에닉 「지옥」
마치 천국처럼 보이는 지옥
서사를 지운 신자유주의
타인과의 대화마저 사라진 곳
물질에서는 정말 풍요가 나오는가. 한도 없는 신용카드를 들고 면세점을 돌아다니며 모든 시간을 쓸 수 있는 세계는 천국일까 지옥일까. 자본은 공간에서 시간을 지워낼 수 있다. 시간을 밀어낸 공간을 부유하는 인간의 정신 틈으로 기억과 서사가 스며들 수는 없다. 타인과의 대화가 끊겨버린 '깨끗한 지옥'의 풍경이다.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삼단화 최후의 심판.[사진 |한국 저작권위원회]](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3/26/thescoop1/20250326110134327shby.jpg)
한 남자가 죽는다. 그는 곧 저승사자와 마주한다. 저승사자는 겁에 질린 남자를 평범한 공항으로 안내한다. 저승사자는 남자에게 카드를 한장 건네준다. 그 카드로 남자는 공항 내부의 면세점ㆍ식당ㆍ호텔ㆍ안마방 등 모든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한다.
항공기 티켓도 무료다. 전세계를 공짜로 돌아다니면서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된 그는 평생 성실히 학문을 연구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성실하게 가르친 덕분에 자신이 '천국'에 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다. 그곳에는 엄격한 금기가 있다. 비행기를 타고 세계 곳곳에 갈 수 있지만, 공항 이용자들은 공항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면세점에서 비싼 옷을 사 입어도, 하루가 지나지 않아 옷은 곧 삭아버린다.
사내는 끊임없이 새 옷과 물건을 구입해야만 했다. 소비의 자유를 한없이 누리지만 공항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 다른 공항으로 이동하려면 부지런히 티켓을 예매해야 한다. 사후에 '이상한 공항'에 남겨진 이 남자는 프랑스 작가 가스파르 코에닉의 소설 「지옥(시프ㆍ2022년)」의 주인공이다.
권태를 느낀 그는 누군가와 대화가 하고 싶어진다. 비행기 안이나 공항 로비에서 그가 다른 승객에게 말을 걸자 곧바로 직원이 제지한다. 그 공항의 가장 중요한 규칙은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답답함을 호소하자 저승사자는 "당신이 쓴 논문을 토대로 마련된 최적의 공간"이라고 답변한다. 그는 생전에 신자유주의를 맹신하는 경제학자였다. 공항의 시스템은 지난날 그가 논문에서 반복해 주장한 세계의 질서와 흡사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단명하게끔 제작한 제품의 장점을 내세우며 소비자들이 상품을 계속 구입하도록 더 치열한 소비 경쟁을 유발해야 한다고 논문을 썼다. 그리고 어떤 오류도 일어나지 않는 촘촘한 소비 시스템의 장점을 이론으로 설명했고, 그 냉정한 공리주의의 세계를 학생들에게 강의했다. 공항의 풍경과 시스템은 곧 그가 논문에서 주장했던 세계였다.
"지옥이란 바로 타인이라고 말했던, 이제 죽음의 평안 속에 잠든 그 프랑스 철학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지옥을 좀 겪어본 내가 생각할 때, 지옥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타인이 우리의 관심 밖에서 사라져 잠시 스치는 대체 가능한 한낱 이미지가 되어버리면, 의식과 외부세계 사이에 보이지 않는 커튼이 드리워지듯,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홀로 남겨지기 때문이다(98쪽)."
주인공이 갇힌 공항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어떤 것에도 만족할 수 없는(117쪽)" 쾌적한 지옥이었다. 출구 없는 지옥에서 그가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것은 '우정' '사랑' '연민' '사소한 대화'였다. 그것은 모두 숫자(가격)로 가치를 규정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관계 맺기는 불가능하고, 출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가죽 등산화도, 소렐허브를 곁들인 연어 요리도, 관능적 아름다움도, 심지어 내게서 멀지 않은 곳에 난 대기실 자리까지 모두 다 마다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사위어버린 나는 차라리 지친 몸을 이끌고 서 있는 편이 나았다. 이렇게 지독하고 광기 어린 고집스러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158쪽)."

공항이라는 사후세계는 지금-여기의 암울한 풍자다. 오래된 식당이 사라진 자리에 프랜차이즈 업소가 들어서고, 대기업 브랜드의 아파트 단지가 늘어나면서 낡은 골목이 사라지는 것에 우리는 이미 익숙하다.
구불구불하고 복잡하고 시끄러운 공간은 어김없이 깔끔하고 쾌적한 공간으로 바뀐다. 대학의 건물도 화려한 고층 건물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자본의 공간이 확장될수록 사람들은 점차 상품 관계의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는 존재로 재구성된다.
사람들은 기꺼이 더 빠른 변화와 소비를 추종하면서 이 흐름에 동참한다. 그렇게 자본은 개별적인 장소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지배력을 확장한다. 이런 물리적인 변화는 사람의 인식과 기억의 보존에도 영향을 미친다. 비슷한 공간에 거주하고, 비슷하게 소비하는 사람들의 감각과 상상력은 점차 차이를 잃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대학의 건물이 화려해지고 고층화될수록 인문학과 예술이 천대받는 현상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숫자로 표기되는 가치만을 중시할수록 인문학과 예술은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프랑스 철학자 마르크 오제는 '비장소'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정체성과 관계성, 역사성이 소거된 공간이 늘어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고속도로, 공항, 대형할인점 등은 이미지에 의한 매개를 통해 경험되는 대표적인 비장소의 공간이다.
비장소의 특징은 '과잉'과 '단절'이다. 그곳에서는 고객과 점원 사이의 지극히 사무적인 대화 외에는 대화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상품을 선택하고 값을 지불하는 과정에는 텍스트와 이미지, 신용카드를 읽는 카드리더기 정도가 동원될 뿐이다. 신용카드는 비장소를 상징하는 명시적 기호다. 이 공간에 들어선 자는 해당 공간에 합당한 자격을 갖췄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또한 '비장소'에는 과거가 없고, 오직 현재만 이어진다. 최신 뉴스(유행) 외에는 어떠한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갇힌 공항에서는 루이 16세, 프로이트, 닐 프리드먼 등 역사적인 인물들도 그저 평범한 '승객(소비자)'에 불과하다. 그들은 모두 권태로운 표정으로 공항시설을 이용하고, 비행기를 타고 이동할 뿐이다. 더 많은 소비에 중독될수록 개별적인 '기억'과 '개인의 서사'는 힘을 잃고 만다.
![영화 웜바디스의 한 장면. [사진 | 더스쿠프 포토]](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3/26/thescoop1/20250326110137228mvow.jpg)
이 프랑스 작가의 소설에 묘사된 지옥은 기발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풍경이 아니다. 소설에 묘사된 지옥은 지금-여기의 현실이다. 공항을 배회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소비하거나 새로운 장소에 방문할 때마다 사진을 찍어 SNS에 과시하면서 일시적인 행복감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친다.
인간은 모두 늙고, 병들어 죽는 존재다. 새로운 기술과 세련된 소비를 찬양하는 세계에서도 인간은 계속 낡아갈 뿐이다. 그 진실을 외면하고, 내면의 허기를 소비로 채울수록 인간은 사유를 잃는다. 그런 인간들로 가득한 세계는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이 물음에서 생성된 캐릭터가 바로 '좀비'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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