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SOS에 제때 응답을…“친밀관계 사망검토제 필요”

김효실 기자 2025. 3. 25.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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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 배우자·연인 간 살인 등
원인 살펴 범죄 미리 막는 제도
입법조사처 “도입 서둘러야”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해 11월25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을 맞아 여성 살해 규탄하는 ‘192켤레의 멈춘 신발’ 행위극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15년간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된 여성과 주변인이 최소 1672명, 2023년 한 해 동안만 최소 192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1990년 1월15일 조지프 차란은 9살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던 전 아내 비나 차란을 죽인 뒤 자살했다. 아들과 다른 어린이, 교사들이 함께 있던 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비나는 죽임을 당하기 전 14개월 동안 자신과 아들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썼다. 자주 폭력을 행사하던 조지프와 별거·이혼했고, 아들의 양육권을 확보했으며, 법원으로부터 전 남편을 상대로 한 접근금지 명령을 받아냈다. 그러나 조지프는 법원 명령을 어기고 범행을 저질렀으며, 비나가 도움을 요청했던 여러 기관은 가해자가 총을 소지하고 있으며 피해자를 죽이겠다고 위협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비나를 보호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샌프란시스코, 나아가 미국 여러 지역의 가정폭력 대응 정책에 큰 변화를 촉발했다. 정책 변화의 핵심에는 피해자가 죽음에 이른 과정을 심층 조사해 구체적인 대응책을 마련하는 ‘가정폭력 사망검토제’ 도입이 있었다. 전·현 배우자나 연인 같은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이 지난해에만 최소 181명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25일 발간한 ‘친밀한 관계 살인의 해부’ 보고서에서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가정폭력방지법)에 가정폭력 사망검토제 도입 근거 조항 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가정폭력 사망사건을 가해자 개인의 폭력성 문제나 피해자의 ‘불운’으로 축소하는 대신, 피해자 보호 절차·정책의 총체적 실패 원인을 살펴 대응 체계를 손보기 위한 목적에서다.

보고서를 보면, 가정폭력 사망검토팀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처음 설치·시행된 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영국, 포르투갈, 스웨덴 등으로 확대됐다. 2023년 유엔(UN)이 낸 페미사이드(여성살해) 보고서도 여성 살해를 예방하기 위한 전략 가운데 하나로 가정폭력 사망검토제를 소개한 바 있다. 입법조사처는 나라·지역별 차이는 있지만 “주로 법률에 (사망검토 팀 또는 위원회) 설치·운영 근거를 두고,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관련 기관들이 참여해 사건 진상을 규명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했다. 세계 각국의 사망검토팀은 가정폭력에 개입하기 위한 공적 자원 부족, 가정폭력 심각성에 대한 인식 부족과 관련 기관 간 소통·협력 공백 등의 허점을 드러내고 각 기관에 구체적 대응책을 권고한 뒤 이행 여부에 대한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특히 영국은 지난해부터 배우자 연인 관계에서 일어난 살인뿐 아니라 자살 사건까지 범위를 확대해 조사하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해 11월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세계여성폭력추방주간을 맞아 여성 살해 규탄하는 ‘192 켤레의 멈춘 신발’ 행위극을 진행했다. 신발이 놓인 종이 위에는 2023년 한 해 동안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름은 가명이다. 백소아 기자

입법조사처는 가정폭력 사망검토제 도입 때 담당 기관을 국무조정실이나 국가인권위원회에 두는 방안을 제안했다. “정부부처 간 협력과 정책 실행력을 담보해야 함은 물론 사건 조사와 검토를 전문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국가인권위가 조사를 담당하고 그 결과를 국무총리에게 보고하며, 국무총리는 권고 이행사항을 90일 이내 서면으로 회신하는 절차를 도입하는 방안 등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팀 또는 위원회 조직 구성원으로는 피해자 변호인, 경찰, 검사, 판사, 지원단체 종사자, 의료기관 종사자, 학교 관계자, 사회복지사, 연구자, 관련 정부부처 관계자, 그 외 관련 기관 관계자 등을 제시했다. 영국과 미국 일부 주,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는 숨진 피해자 가족이나 친구 등을 검토팀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입법조사처는 또한 가정폭력 관계법을 고쳐 사망검토제 대상에 전·현 교제관계 또한 포함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 가정폭력방지법과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 등은 전·현 법률혼과 사실혼, 직계존·비속 등 친족 관계 간 사건에만 적용된다. 입법조사처는 “교제폭력과 가정폭력은 단절적이고 분절적인 개별 사회현상이 아니라, 친밀성을 기반으로 발생하는 연속적인 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점에서 모두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으로 포섭해 통합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회에는 가정폭력처벌법 적용 대상에 교제관계를 포함한 개정안이 여러 건 발의돼 있다.

보고서를 쓴 허민숙 보건복지여성팀 입법조사관은 “사망검토제는 범인 검거에 초점을 둔 수사 제도가 미처 살피지 못하는 피해자 구호와 관련된 사회제도, 관련 기관 간 정보 공유와 협업의 문제, 법과 제도의 미비, 친밀한 관계 폭력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의 한계와 그 여파 등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폭력 예방을 위한 중요한 정보와 대안을 도출해 내려는 제도”라며 “가해자 개인을 비난하고 피해자 사망을 애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적) 개입 실패의 지점과 개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망검토제는 도입을 서둘러야 할 입법 과제”라고 했다.

한편 전진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은 국회 입법조사처 조사관의 보고를 바탕으로 사망검토제 도입을 뼈대로 한 가정폭력방지법 개정안 발의를 준비 중이다. 의원실 관계자는 “국회사무처 법제실에서 개정안 초안 검토를 마치는 대로 법안을 발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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