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포르투갈 마초 권력에 비수를 댄 마지막 '마리아'

최윤필 2025. 3. 2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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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사 오르타(Maria Teresa Horta, 1937.5.20~2025.2.4)
마리아 테레사 오르타와 마리아 이사벨 바레누, 마리아 벨호 다 코스타는 포르투갈의 '세 명의 마리아'로 불린다. 그들은 1972년 ' 포르투갈인의 새 편지(New Portuguese Letters)'란 한 권의 책으로 정치-종교-가부장주의의 포르투갈 마초 권력에 비수를 들이댐으로써 74년 카네이션 혁명의 징검다리를 놓았다. 물론 혁명은 그들의 싸움의 시작일 뿐이었다. 세 마리아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오르타의 30대 시절 사진. 출판사 Dom Quixote 사진.

유럽 변방 이베리아 반도 끝 작은 나라 포르투갈은 15세기 대항해시대를 열어 세계의 절반을 식민지로 삼켰고, 로마제국 멸망(5세기) 이래 근 1000년 만에 유럽을 세계사의 중심에 서게 한 국가다. 기원전부터 1200년간 로마-무슬림 칼리파의 속국으로 짓눌렸던 포루투갈의 그 짧은 영화는 16세기 왕위 계승 과정에서 스페인과 ‘이베리아 연합왕국’을 이루면서 가무러졌고, 17세기 중엽 국가복원혁명(왕정복고전쟁)으로 다시 독립했지만 네덜란드-영국 등 후발 패권국가들의 떠세에 밀려 기를 펴지 못했다. 20세기 초 혁명으로 부패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섰지만 내분 끝에 1926년 군사쿠데타로 이어졌고, 세계대공황 와중이던 32년 권력을 장악한 경제관료 출신 정치인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1889~1970)의 철권 통치가 시작됐다. 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무너지기까지 이어진 20세기 유럽 최장수 독재 체제 ‘이스타두 노부(Estado Novo, 신체제)’였다.

700년 무슬림 지배를 포함한 저 가파른 굴곡의 시대를 관통하며 소위 ‘이베리안 정체성’을 지탱한 게 보수 가톨릭 교권주의와 마초(macho) 문화였고, 그 그늘에서 애절한 가락과 노랫말의 포르투갈 전통 음악 '파두(fado, 숙명)'가 탄생했다.
포르투갈은 바티칸시국과 동티모르 등 옛 아프리카 식민지 일부를 제외하면 지금도 세계에서 가톨릭 인구 비율(2021년 80.2%)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 신체제-독재를 떠받친 양대 기둥도 군부-비밀경찰(PIDE)과 교회-가부장주의였다. 66년 포르투갈 민법은 혼인-가족 관계를 권력 관계(marital power)로 명시했다. “남편은 가정의 수장이다. 그 권위로써 아내를 대변하고, 결혼 생활의 모든 행위를 결정하는 지위를 지닌다.” 한때 사제를 꿈꾸기도 했던 살라자르에게 저 조문은 통치-조직 이념이자 중심 교리였다.

사람 이름은 지역별 사회-문화적 지향과 사적인 염원을 반영한다. 세계인의 이름과 출신지를 분석해 세계를 이해해보자는 취지로 생겨난 국제 NGO 'The Population Project'에 따르면, ‘마리아(Maria)’란 이름은 남자 이름 ‘모하메드(Mohammed)’와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여성 이름이다.포르투갈 한 신문이 조사한 바, 2020년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여아 중 4,872명이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무염시태’의 성모, 즉 정결과 순명의 마리아를 상징한다.
포르투갈의 수많은 ‘마리아’들 속에 20세기 ‘세 명의 마리아(The Three Maria’s)’가 있었다. 그들은 이름의 숙명을 거슬러 72년 한 권의 책 ‘포르투갈인의 새 편지(New Portuguese Letters)’로 억압의 권력과 교회, 마초 문화의 목덜미에 비수를 들이댔고, 나란히 탄압받으며 70년대 진보- 여성운동 진영의 분노와 저항 의지를 북돋움으로써 74년 ‘카네이션 혁명’의 징검돌을 놓았다.
비평가 린다 카우프먼의 말처럼, “여성이 남성에게 거역하면 세상에 바뀌지 않을 것이 없다는 신념”을 일깨운 포르투갈의 세 마리아 중 마지막 생존자, 마리아 테레사 오르타(Maria Teresa Horta, 1937.5.20~2025.2.4)가 별세했다. 향년 87세.

'Novas Cartas Portuguesas(New Portuguese Letters)'를 출간한 70년대의 세 마리아. 왼쪽부터 마리아 이사벨 바레누, 마리아 테레사 오르타, 마리아 벨호 다 코스타. Dom Quixote

‘세 마리아’, 오르타와 마리아 이사벨 바레누(Maria Isabel Barreno, 1939~2016), 마리아 벨로 다 코스타(Maria Velho da Costa, 1938~2020)는 1930년대 모두 중산층 집안에서 나란히 태어났다. 살라자르가 “우리는 신과 신앙, 조국과 조국의 역사, 권위와 특권, 가족과 가정 윤리에 대해 토론하지 않는다”는, 교회-국가-가부장 권력의 신성불가침 선언으로 권력을 장악한 직후였다.

오르타는 포르투갈의사협회장을 지낸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 리스본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13세 무렵부터 시를 지어 23세 때 첫 시집을 출간했고, 문학비평가 겸 저널리스트로서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A Capital’ 등 잡지 에디터로도 일했다.

순종은 가톨릭 교회가 신자에게 요구하는 근본적인 태도 중 하나다. 자신의 한 생을 '불순종(insubordination)’이란 단어로 요약한 바 있는 오르타였다. 그는 자신-여성이 겪어온 상시적 폭력과 억압에 대해 말하지 않고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는 내용의 표제작 ‘나의 그녀(Minha Senhora de Mim, 1967)’를 담은 시집을 출간했다가 거리에서 청년들에게 구타를 당한 적이 있었다.
여성 저널리스트로서 겪던 상시적인 검열과 억압에 진저리 치던 그는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또래 여성 바레누 등과 글로써 현실에 맞서기로 의기투합한다. 대학 동문인 세 마리아는 17세기 한 수녀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포르투갈 수녀의 편지(Letters of a Portuguese Nun)’를 모티브로 삼았다. 프랑스 기병 장교와 사랑에 빠졌다가 버림당한 수녀가 원망과 회한, 그리움을 담아 쓴 5통의 편지(형식의 픽션).
20세기의 세 마리아는 여성으로서의 삶과 생각을 자유로운 형식과 내용의 글로 쓴 뒤 매주 두 차례 만나 토론했다. 주제는 “여성의 사랑과 성, 수녀원으로 상징되는 여성의 은둔(배제)-고립, 자매애, 글쓰기, 분노와 증오, 전쟁, 종교-도덕적 편견, 금기와 죄의식" 등 다양했다. 필자들은 300년 전의 수녀뿐 아니라 그를 버린 연인, 20세기 아프리카 식민지 전장의 병사와 그의 아내에게도 이입하곤 했다.
책 내용은 ‘여성에게도 할 말이 있고, 말할 수 있다’는 선언을 넘어, 가히 포르투갈 사회를 경악케 할 만큼 격렬하고 파격적이었다. “당신을 사랑한 게 아니라 ‘당신’이라는 존재(타자)에게 편지를 쓰는 나를 사랑한 것”이었다는, 17세기 수녀를 대변한 20세기의 마리아, 성애의 갈증을 자위로 달래는 수녀, 식민지 전쟁터로 떠난 남자를 그리워하며 짐승의 몸을 탐하는 여성의 고백, 연인에게 학대 당하고 아비에게 강간당한 딸-마리아, “나는 평등하지 않은 관계의 사랑 따윈 할 마음이 없다. 그게 내가 남편을, 남자를 거부해온 이유”라는 고백 등등. 시집가는 딸에게 어머니가 “여성에게 결혼은 출산과 울기”라는 말을 교훈처럼 들려주던 시절이었다.
세 마리아는 책 표지에만 이름을 밝히고, 어떤 글을 누가 썼는지 알 수 없게 필자 이름을 감췄다. 책의 후폭풍을 함께 맞겠다는 연대의 의지이자 여성이 겪는 차별과 폭력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방편이었다.

오르타와 바레누는 74년 5월 출옥 직후 포르투갈 최초 여성운동단체 '여성해방운동(Movimento da Libertação da Mulher, MLM)'을 창립, 젠더-가정폭력 근절과 낙태 합법화 등을 위한 캠페인을 전개했다. 70년대 MLM 시위 장면. Jacobin.com

책은 출간 즉시 전량 수거됐고, 세 마리아와 출판사 대표는 “표현의 자유를 남용”하고 “공공의 품위를 모독”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살라자르가 쓰러진 뒤 68년 총리를 맡은 그의 심복 마르셀루 카에타누는 “국가에 망신을 준 비애국적인 여자들”이라고 공개 비난했다.
하지만 책은 프랑스로 밀반출돼 이내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서 잇달아 번역 출간됐고, 포르투갈로도 재반입됐다. 전대미문의 문학 스캔들 한켠에선 누가 어떤 마리아일지, ‘누가 백랍처럼 흰 겨드랑이’와 ‘비단결 같은 엉덩이’를 지닌 마리아일지 단서를 찾으며 추리를 일삼았고, 전미여성기구(NOW)는 73년 7월 기획회의에서 국제 페미니즘 운동의 첫 대응 이슈로 세 마리아의 구속 사태를 채택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마르그리트 뒤라스, 에이드리언 리치 등이 포르투갈 대사관 앞 시위 등에 동참했다.

여론과 권력의 눈치를 보며 판결을 미루던 재판부는 카네이션 혁명으로 정권이 붕괴한 지 열흘쯤 뒤인 74년 5월 7일에야 “(책은) 기소 내용과 정반대로(…) 대단히 수준 높은 예술작품”이라며 셋을 석방했다. 여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리스본 모니카스(Monicas) 여성교도소를 나온 오르타와 바레누는 석방 당일 저녁 포르투갈 최초의 여성인권단체 ‘여성해방운동(이하 MLM)’을 설립했다. 코스타는 “모든 피억압자의 해방”을 지지하며 MLM이 아닌 포르투갈공산당(PCP)에 입당했다. 오르타는 “여성은 의사와 변호사 정치인 등 권력자뿐 아니라 모든 남성에 의해, 노동자와 농민에게도 얻어맞고 강간당한다”는 입장이었다.
혁명 2년 뒤인 76년 포르투갈은 개정 헌법으로 남성과 여성의 절대적 평등을 선언했고, 77년 민법을 개정 ‘결혼의 권력’ 대신 ‘부부 상호 협력의 의무(duty of cooperation)’를 명시했다. 하지만 혁명 정부를 비롯한 포르투갈 남성 주류사회는 MLM의 요구 즉, 성폭력-가정폭력 근절과 임신중지권(낙태권)에는 철저히 냉담했다. 식당 개업 1주년 이벤트로 손님들에게 나눠주려고 준비한 카네이션을 그 식당 종업원이 혁명군 병사들에게 나눠주면서 ‘카네이션 혁명’이란 낭만적인 이름이 붙게 된 사연은 유명하다. 하지만 처음 꽃을 건넨 주인공인 셀레스티 케이루(Celeste Caeiro, 1933~2024)가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이혼하고 혼자 궁핍하게 아이를 키운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75년 1월, MLM이 회원 10여 명과 함께 리스본 에두아르두7세 공원에서 작은 이벤트를 준비했다. 68년 미국의 ‘브라 버너스(Bra burners)’들처럼, 여성 차별-억압의 상징물 몇 개를 불태우자는 기획이었다. 혁명 이후 독일 국경을 넘어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온 포르노 잡지들, 냄비 등 가사용품, 신부 면사포 등이었다. 젊은 여성회원 일부는 각각 매춘부와 주부, 신부로 분장을 했고, 일부 회원은 아이들까지 데려왔다.
행사 며칠 전 한 주간지(Expresso)가 여성들이 스트립쇼를 펼치며 남성들에게 꽃을 선물하기로 했다는 내용으로 그 이벤트를 소개했다. 남성 2,000여 명이 공원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여성들을 보자마자 “저X들의 옷을 벗기자”며 폭도처럼 흥분했고, 피신하는 이들을 뒤쫓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오르타 등 여성과 아이들은 공원 지척의 한 회원 집으로 간신히 피신했다. 남성들의 가슴에는 포르투갈공산당과 사회민주당(PSD) 등 혁명 주력 정당 당원 배지들이 자랑스레 달려 있었다고 한다. 그 현장을 취재한 저명 저널리스트 아델리누 고메즈(Adelino Gomes)는 훗날 ”내가 남자란 사실이 그날만큼 수치스러웠던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곤욕을 치른 MLM 회원 이자벨 텔리누스(Isabel Telinhos)는 “교육 수준과 계급, 이데올로기를 불문하고 이 나라 남성들이 그날 공원에서 보여준 행태는 왜 우리에게 페미니스트 운동이 필요한지 또 한 번 뼈저리게 깨닫게 한 계기였다”고 말했다.

오르타는 페미니스트 작가로 살며 시와 소설 등 30여 권의 책을 출간하고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불순종(insubordination)이란 낱말로 요약했다. Dom Quixote

1989년 영국인 20대 여성 관광객 두 명이 포르투갈 남성 4명에게 집단 성폭행 당했다. 법원은 여성들이 먼저 남자들에게 “주저없이 차를 태워달라고 청함으로써 범죄 실현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라며 피의자들을 감형했다. 전처가 혼인관계 중 외도한 사실을 이혼 후 알게 된 전남편과 그의 지인이 전처에게 못이 박힌 방망이를 휘둘러 중상을 입힌 2017년 사건에서도 법원은 가해자 남성이 겪은 굴욕감과 우울감 등을 감형 사유로 들며 가벼운 처벌(징역 1년과 벌금형)을 내렸고, 항소법원 역시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성경 구절과 간통한 아내를 살해한 남성은 6개월간 마을에서 쫓겨나는 상징적 처벌만 받게 한 구 형법 등을 언급하며 검찰 항소를 기각했다.

72년 책은 세 마리아가 각자의 생각을 공유하고 또 미묘한 차이를 확인한 뒤 정중하게 작별하고 각자의 길로 나아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혼자 가지만 이제 덜 버림받았다고 느낄 것이다.” 20세기의 세 마리아도 작가로서, 문화 관료로서 각자의 삶을 살았다.
오르타는 75년 포르투갈공산당에 뒤늦게 입당해 89년까지 활동했고, 80년대 페미니스트 잡지 ‘여성들(Mulheres)’을 창간해 이끌었다. 시집과 소설 등 30여 권의 책을 냈고 숨질 때까지 거의 매일 시를 써서 SNS를 통해 독자들을 만났다. 주제는 주로 페미니즘이었다. 그는 2012년 포르투갈 수상이 시상하는 전통으로 유명한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디니스 상(D. Dinis Award)’ 수상을 거부했다. “우경화한 사회민주당 정부 수상(Pedro Coelho)이 주는 상은 받지 않겠다”는 게 거부 이유였다. 그는 저널리스트 루이스 데 바로스(Luis de Barros, 2019 작고)와 결혼해 해로하며 아들 한 명을 두었다.
2014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사람들은 왜 내가 페미니스트가 되었는지 묻곤 한다. 왜냐하면 내가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여성이고, 인류의 절반이 그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한 이 땅의 진정한 자유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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