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 전성시대의 언론 [저널리즘책무실]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
한국방송(KBS) 시사프로그램 ‘추적 60분’의 ‘극단주의와 그 추종자들’(3월7일 방송) 편을 뒤늦게 봤다. 양상훈 조선일보 주필의 칼럼(‘중국 간첩 99명 체포’ 괴담과 언론)을 읽고서다. 양 주필은 칼럼에서 이 탐사기획을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보도”라고 칭찬했다. ‘1등 신문’ 주필이, 그것도 기명 칼럼에서 대놓고 칭찬을 하다니, 도대체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다.
이 기획물은 ‘추적 60분’이 제작한 ‘계엄의 기원’ 2부작의 두번째 편이다. 부정선거 음모론을 다룬 1회분(‘선거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이어 2월28일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석연찮은 이유로 한차례 결방됐다가 일주일 뒤 방영됐다. 보수 매체도 칭찬한 탐사보도를 한국방송 사쪽이 왜 애초 편성에서 삭제했는지 의아하다. 극우 세력의 난동을 우려했다고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언론의 역할을 방기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방영된 이 기획물은 내란 사태 와중에 창궐하고 있는 허위 조작 정보와 음모론이 어떻게 확산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작진이 주목한 것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세력이 신봉하는 ‘중국인 간첩 99명 체포설’이다. 제작진이 파악한 실체는 이렇다.
체포설의 ‘기원’은 지난해 12월 중순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다.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추리소설이야. (중략) 난 지금부터 중국의 해커가 되는 소설을 쓸게….” 중국인 해커가 선거 개입을 위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잠입해 있었다는 것이 이 ‘소설’의 뼈대다. 이 소설이 계엄 당일 선관위 연수원에 민간인 90여명이 감금된 정황이 있다는 한 시사주간지 보도와 짜깁기되면서 ‘중국 간첩 체포설’로 둔갑했다. 이후 일부 유튜버와 극우 성향 매체 스카이데일리가 근거 없는 주장을 서로 주고받으며 음모론을 키웠다. 황교안 전 국무총리 등 일부 정치인들도 숟가락을 얹었다.
이 기획물의 백미는 ‘캡틴 아메리카’ 안병희씨 인터뷰다. 안씨는 ‘중국인 간첩 99명 주일 미군기지 압송’ 등 스카이데일리가 ‘단독’이라며 내보낸 일련의 부정선거 음모론 기사들의 핵심 제보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안씨는 제작진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진실을 털어놨다. “기자도 정치인도 모두가 저한테 속은 거죠.” 지어낸 얘기라는 취지다. 그는 “우파에게 ‘미국이 대한민국의 부정선거를 밝히려고 하는구나’ 하는 희망을 심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파의 희망’이라는 측면에서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와 스카이데일리 기자가 함께 ‘만들어낸’ 기사가 윤 대통령 탄핵심판에서도 탄핵 반대 논리로 거론됐으니 말이다. 윤 대통령 대리인인 배진한 변호사는 탄핵 심판 2차 변론기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침 신문에도 수원 연수원에 있던 중국인 90명이 오키나와 미군 부대 시설 내에 가서 조사를 받았고 부정선거에 대해 다 자백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걸 밝히기 위한 비상계엄이 국헌문란이고 퇴직해야 할 사유라는 것은 극히 의문이 든다.” 부정선거 망상에 휩싸여 내란을 획책한 대통령에, ‘추리소설’에 기대 그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대리인이라니.
어디 이뿐인가. 비상계엄이 선포된 이후 지금까지 극우 세력이 퍼뜨린 터무니없는 허위 조작 정보와 음모론은 셀 수 없이 많다. 가히 ‘가짜뉴스’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음란물 댓글 관련 허위 조작 정보도 ‘중국인 간첩 체포설’과 똑같은 방식으로 독버섯처럼 퍼져 나갔다. 국민의힘은 대변인 명의로 문 대행을 비판하는 논평을 냈다가 조작으로 밝혀지자 마지못해 사과하기도 했다. 익명의 온라인 커뮤니티, 유튜브, 정치인, ‘따옴표 언론’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확성기 노릇을 하는 행태를 두고,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허위 조작 정보 확산 사슬”이라고 꼬집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내란 사태를 맞아 기성 언론이 적극적으로 사실 검증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일보는 극우 세력이 제기하는 각종 부정선거 음모론 팩트체크 기획을 내보냈고, 한국일보는 ‘전광훈 유니버스’ 기획을 통해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원로목사와 그의 측근들의 돈벌이 실태를 파헤쳤다. 한겨레21은 탄핵 반대 오픈채팅방에 만연하는 ‘혐중 가짜뉴스’ 실태를 보도했다.
건강한 공론장을 유지하는 것이 언론의 핵심 역할이라는 점에서 이런 움직임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지금처럼 공론장이 허위 정보로 오염된 적이 또 있었던가. 극단주의가 횡행하는 사회에서 언론이 설 자리는 없다. 진보, 보수를 따질 문제도 아니다. 극단 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 언론의 시대적 과제가 됐다.
저널리즘책무실장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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